“이 양반 전화 안 받네.” * 관호는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려댔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비틀자 탈칵, 하고 문이 열렸다. 관호는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손을 더듬어 불을 켜자 책과 DVD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책장이 나타났다. 관호는 멍하니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음료수 캔을 방 안 가득 쌓아놓은 것처럼 기이한 모양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책을 대체 어디다가 써먹는 걸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녹음기였다. 소형 테이프가 들어있는 오래된 녹음기. 관호는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았다.
별 걸 다 녹음하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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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일을 하는 대학 동창에게 연락했더니 일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들어보니 막노동을 하는 인부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는데, 식사준비를 비롯한 잡다한 심부름을 하고 하루 일당을 계산해 나누어주는 정도였다. 간혹 고집 센 인부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할 때를 제외하곤 어려운 게 없다고 한다. 그 녀석은 ‘쉽다’는 말을 너무나 쉽게 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일단 하겠다고 말했다. 감사할 일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럴 땐 명문대 나왔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워진다. 한 달 일하고 백오십을 준다고 했으니 내 처지에 적은 수입은 아니다. 그 돈으로 방값을 해결하고 나면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글도 좀 써질 것 같다. 탈칵, 하고 녹음을 중단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탈칵, 하며 녹음이 시작되었다. ……일을 끝냈다.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일만 했다. 시나리오나 영화에 관련된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문득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영화만이 가장 큰 자유라고 믿어서 이혼했는데 일을 하는 동안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내가 미워진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내가 가진 무언가를 표출하고 싶은 욕구에 더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자유롭기 위해서 더 많은 것들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우습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내가 가족과 결별했기 때문에 더 홀가분한 삶을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이 내 옆에 없다고 해서 내 마음속에서 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여전히 이혼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에 아내와 통화했을 때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말 자유로운가. 피곤이 몰려온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사장이었다. 관호는 녹음기를 끄고 전화를 받았다. 사장은 다짜고짜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위엄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내리깐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관호는 두꺼운 눈썹을 찌푸리며 이번 주 안으로 입금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짜증이 배어 있는 그의 말투에 사장은 알았다며 더 이상 말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개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며 관호는 진 씨의 집을 나왔다. * 일이 끝난 후에 관호는 영의와 무연과 함께 술을 마셨다. 다른 동료들보다도 이 둘은 죽이 잘 맞았다. 무연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영의는 기혼이었음에도 외박을 밥 먹듯이 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건우가 축구부로 들어간 이후에 알 수 없는 기류가 부부 사이에 종종 흐르곤 했다. 결혼 초기부터 살가운 말이나 행동과는 거리가 먼 아내였지만 요즘 들어 더욱 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적어도 이 주에 한 번은 가졌던 잠자리도 아내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져 한 달을 훌쩍 넘기곤 했다. 아내가 거부의사를 밝힐 때마다 관호는 자존심이 상해 대놓고 욕을 하거나 옷을 주어입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진탕 술을 마셨다. 가끔씩 견딜 수 없이 누군가를 안고 싶어지면 자주 출입하는 매춘업소에서 여자를 사기도 했다. 새삼스레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았지만 어느 여자도 아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증오스러우면서도 남다르게 느껴져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관호는 취중에 그렇게 정의해보기도 했다. * …… 딸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다가 왼쪽에서 튀어나온 차와 부딪쳐 다리가 부러졌다. 사고 장면을 목격한 사람에 의하면 무슨 인형이 내던져진 줄 알았단다. 응급실에서 수술을 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질 때까지 아내는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나는 졸음이 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셔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 시나리오 수정에 대한 영화사 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새벽까지 작업을 했다. 최대한 제작비가 들어가지 않는 선에서 작품을 썼는데도 영화사는 곤란하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주 습관적인 태도다. 전에는 그것이 싫었는데 지금은 나 역시 적극적으로 검토해보려 노력하고 있다.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정태에게서 연락이 왔다. 출판사 쪽에서 제의가 들어와 이번에 에세이를 한 편 출간할 모양이다. 책을 탈고한 후엔 다시 외국으로 나간다고 했다. 밖이 좋은가 보구나, 하고 묻자 정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요즘 나, 행복한 것 같애 형, 하고 대답했다. 결혼이냐 자유냐를 택하는 기로에서 정태는 후자를 택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지금 그의 모습이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 만큼 취해 이차로 호프집에 갔다. 누군가 자꾸만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쪽을 보고 앉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해 나가다가 얼굴이 작고 눈매가 날카로운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상해서 정태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누구냐며 정태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남자는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자 정태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남자와 전혀 다르게 생긴 젊은이의 멱살을 잡은 채 들어와 이놈이냐고 소리쳤다. 완전히 당황한 남자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정태의 손아귀 안에서 버둥거렸다. 그 꼴이 우스워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남자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한 후에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나는 갑자기 누군가와 싸우고 싶은 엄청난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정태와 헤어지고 나서 그 충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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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호는 영의와 헤어지고 무연의 집으로 갔다. 원룸인 무연의 집은 옷가지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대충 발로 휘저어 주변을 정리한 후에 둘은 옷도 벗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TV를 보고 있을 때 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냐는 관호의 말에 무연은 애인이라고 했다. * ……위궤양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무절제한 식습관과 생활패턴이 문제라며 될 수 있으면 쉬라고 말했다. 한 봉지 가득 약을 사들고 오다가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알코올이 궤양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찌릿찌릿 떨려왔다. 한 병을 다 비울 즈음에 갑자기 구토가 치밀어 황급히 계산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를 하는데 문득 내가 언젠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어릴 적이었을 것이다. 몸이 너무 허약해 유행성 감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자주 구토를 했었다. 화장실을 나와 자리에 누우며 너무나 편안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도 학교를 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옆에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가 여전히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암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닥 감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일 모레까지 수정한 시나리오를 넘겨주기로 약속했는데 아무런 의욕도 나질 않는다…… 꿈에서 본 외계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 물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떠나자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죽이기 위해서 회유하고 있었던 걸까. 물속으로 들어가든, 외계인과 함께 떠나든, 혹은 까닭 없이 죽임을 당하든지 간에 어쨌든 모래사장에 머무는 것과는 전부 거리가 멀다. 끊임없이 바닷물이 날름거리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부드러운 모래 속에서 날을 세우고 있는 해변과는……그것에 머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 누구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간에 말을 하는 순간 상황이 불리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관호는 조용히 창문의 방충망을 열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양 옆으로 차가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되었다.
불을 켜자 집안은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꽃병이 깨어져 있고 액자가 부서진 채 내팽개쳐져 있었다. 액정이 찢어진 프로덕션TV, 쓰러져 있는 오디오의 스피커, 사방으로 깨어져 널려 있는 접시들. 안방과 건우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지만 아내와 건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소파에 주저앉아 멍하니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큰소리를 내며 초침은 굴러갔다. 탈칵, 탈칵. 바늘에 찔린 듯 그는 온몸을 떨었다. *
* 관호는 비에 흠뻑 젖어 시장으로 들어섰다.
주말 저녁이면 갑자기 많아지는 외국인 노동자들 틈을 비집고 시장을 빠져 나오자 뒤쫓던 남자가 사람들에 치여 헤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관호는 이곳이 1196-5번지 건물 근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곳으로 향했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고 곧 이어 천둥이 쳤다.
1196-5번지에 도착하자 사 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예상대로 진 씨의 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관호는 재빨리 문을 닫아걸었다. 턱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살갗이 벗겨진 손등이 비를 맞아 쓰라렸고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경찰에 신고해야 해. 관호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핸드폰이 없어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전화기가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다시 달리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일단 그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다시 용기가 생기면 뛰어나가자고 마음 먹었다. == * 해당 사이트에 게재된 ‘소닉 노블’의 저작권은 일회용 라이타에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