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특명! 아리수레인저

  나로호 발사 실패 이후-보다 정확하게는 3차 발사 실패 이후- 정부는 표면적으로 우주 사업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당장 눈앞으로 닥쳐온 현안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차 보였고, 패배한 사업에 매달릴 열의 따위는 남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미디어를 포함한 다각도의 채널들이 정부를 비난할 때에도 그들은 꿋꿋이 세종시 수정안을 보완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대북정책을 구상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로호 개발에 대승적 의미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 뒤로는 누가 먹어도 목에 걸려 죽을 게 뻔할 만큼 커다란 떡고물을 기대하던 몇몇 나라들은 단 세 차례의 패배에 이렇게 쉽게 수건을 링에 던진 대한민국 정부를 최대한 우회적으로, 그러면서도 최대한 원색적으로 비난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미 5천억 원 규모의 장대한 폭죽을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터뜨려버린 정부는 ‘어디서 개가 짖냐’는 식으로 그들의 정치적 비난을 우아하게 무시했다.
  국민들의 반응은 재미있었다. 우주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자신들의 ‘나와바리’라고 지칭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TV 앞에 모여서 숨죽여 지켜보던 그때 그 코흘리개들은 이미 우주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심장을 펌프질 하기에는 너무 많이 나이를 먹어버렸고, 나로호는 우주선이다-라는 팩트에 기반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오로지 바이어를 접대할 때, 회사에서 식사시간에 직원들이 나누는 최신 주제의 대화에 따라가기 어려울 때, 회식이 끝나고 한 새벽 ‘따따블’을 불러 겨우 탄 택시 안에서 거나하게 취한 채 괜히 택시기사에게 뭐라도 말을 걸고 싶을 때에나 통용되는 주제였다. 자연스레 나로호 이야기는 사방팔방에 쓸데없는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젊은 층으로 옮겨갔다. 우주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로호에 주의를 기울이던 것도 아니지만 정부의 실패를 기뻐하고 싶은 사람들은 나로호가 하늘에서 5천억 원짜리 파편을 흩날리며 아름답게 비산하는 것을 지켜보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처음에는 정부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도배되던 게시판에 곧 반박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언제나와 같은 전투지역이 되어갔다. 한두 번의 실패에 연연하고 실패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 비난하고만 있으니 거시적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사업들이 성과를 맺지 못하는 거라며 호되게 사람들을 질타하던 ID RedArisu의 글에 추천과 반대가 각각 세자리 수 이상 달리고 리플이 폭발할 지경이 되자 정부를 비난하는 입장에서 주옥 같은 글을 쓰던 ID anarchist_ranger는 코웃음을 치며 태연히 그를 ‘딴나라당 알바’로 몰아갔다. ID부터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어디 지금 IP조회하면 서울시청에서 글 쓰고 계시는 걸로 나오는 거 아닙니까?

  레드는 뜨끔해서 키보드를 놓았다. 이놈이 CCTV를 달았나?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주위를 한번 휘휘 둘러본 레드가 멋쩍은 얼굴로 인터넷 게시판을 작업표시줄로 내리자 아까부터 반짝거리고 있던 대화창이 싱겁게 고개를 내밀었다. 블루였다.
  -블루님의 말:
   문자 받았어요?
   소집명령 같은데
   이거 가야 하는 거에요?
  깜박거리는 대화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레드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문자메시지가 들어와있었다. 등록만 해놓고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 번호로부터였다.
  [긴급소집명령
  10-07-03:시청지
  하회의실103호로
  집합할것
  02-xxx-xxx9]
  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블루의 대화창이 연신 깜빡였다. 레드, 레드? 이거 소집이에요? 우리 출동하는 거에요? 의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블루의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레드는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본 후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레드님의 말:
  진짜 출동인가봐요.

  그런 이유로, 2010년 7월 3일은 서울시청 내부 산하기관이자 비밀조직인 아리수레인저에게 있어 대단히 특별하고 기념비적인 날이 되었다. 아리수레인저가 조직된 이후 처음으로 내려진 출동명령이었고, 발족식 이후 처음으로 전 멤버가 소집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레드는 지나친 긴장으로 소화불량에 걸린 것만 같은 배를 문지르며 앞에 ‘놓여진’ 문을 노려보았다. 지하회의실 103호라고 쓰여진 문패가 지나치게 반질거렸다. 레드는 디자인 서울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멋대가리 없이 깔끔한 글자체를 바라보며 문득 지난 날을 회고했다.
  아리수레인저-라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지은 것 같지 않은 이름은 둘째치고-는 새 정권의 취임과 동시에 발족된 대통령 직속 조직으로 정식 명칭은 ‘대한방위사령본부 수도방위전대 아리수레인저’였고 서울 시장이 전권을 위임 받은 특수전대였다. 그 존재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고-아리수레인저의 존재를 국가기밀에 준하는 특1급 비밀로 대하는 처사에 관해 옐로는 ‘나 같아도 부끄러워서 말 안 하겠어요’라는 쿨한 한마디를 던진 바 있다-레인저 각각에게 지급된 특수핸드폰을 통해서만 지령이 내려졌다. 본부로는 서울의 심장이자 권력의 중심인 서울 시청 지하 출입통제구역 내부 지하회의실을 사용하는 아리수레인저의 존재의의는 그러니까,
  “통념적, 보편적, 정상적 관념을 저해하는 비일상적 국가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특수비밀전대?”
  아리수레인저 강령 제1조가 적힌 수첩을 들여다보던 핑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묻자 블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는 점점 더 큰 소리로 꾸룩대는 배를 세게 누르며 자신이 점심에 뭘 먹었던가를 되짚어 떠올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핑크는 마스카라가 번질 까봐 조심조심 손톱 끝으로 빠진 속눈썹을 건져내며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뭐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이거? 난 무슨 인턴 이런건줄 알고 신청한 건데?”
  핑크는 서울소재 명문대 4학년의 아가씨로 현재 취업을 위해 1년 휴학 중이라고 했다. 시청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나중에 이력서에 쓰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대외비면 이거 못써먹는 거 아냐? 그렇게 툭 던지는 핑크의 목소리엔 짜증이 배어있었다.
  “애초에 아리수레인저가 뭐야…… 이름도 유치해서 설마 했는데.”
  “에이, 그래도 나라에서 하는 거라잖아요. 뭔가 중요한 일이겠죠.”
  그렇게 말하며 핑크를 달랜 것은 블루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덩치 큰 블루는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돌아다니면서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파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블루의 마냥 낙관적인 의견에 콧방귀를 뀐 것은 블랙이었고 옐로는 한숨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의 잘생긴 블랙은 서른 살을 갓 넘긴 것처럼 보이는 마른 남자로 변호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법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했고, 동글동글하니 귀엽게 생긴 옐로는 전문대를 졸업한 후 몇 년 일을 하다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현재 백수라는 이야기다.
  레드는 입을 다문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을 거듭했다. 레드는 공무원이었다. 서울 시청에서 일하는 7급 공무원. 새로운 조직을 하나, 위쪽에서 만들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상관이 자길 은밀히 불러내서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레드는 이것이 승진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 조직을 하나 만들 건데, 아주 비밀스러운 거야. 위쪽에서 직접 통제하는 거니까…… 중요한 일이지. 내 생각엔, 그걸 자네가 좀 맡아줬음 좋겠어.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워 물며 그렇게 말하던 상관은 문득 생각난 듯이 담배를 창틀에 비벼껐다. 제에-기, 욕설을 내뱉는 상관의 어깨 너머로 선명한 금연마크가 뚜렷이 보였다.
  “……뭐 어쨌든, 그래서 오늘 우리는 왜 불렀대요?”
  툭 내던진 블랙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레드에게로 쏠렸다. 왜, 왜요? 리더잖아요. 자신을 향한 여덟 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레드가 뻘뻘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모두 모였습니까?”
  검은 정장을 입은 두어 명의 사내들이 문을 지키고 섰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레인저 모두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옐로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고, 블랙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블루는 긴장한 얼굴이었으며 핑크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깜빡깜빡 눈짓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레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재집권에 성공한 남자, 서울 시장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리수레인저 여러분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서 정말 기쁘군요. 가급적이면 여러분들을 소집하지 않고 끝내려 했습니다만……”
  시장은 말끝을 흐리며 레인저들을 쭉 훑어보다가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손짓했다. 시장의 존재감에 눌려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던 초로의 노신사는 분명 아리수레인저의 발족식에서 만났던 사람이었다. 블루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남박사……’ ‘그건 독수리 오형제 이야기고, 지금 이게 만화라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도 레인저잖아요, 아리수레인저.’ 블랙이 뭐라고 더 말하려다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서 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황박사님, 설명해주시죠.”
  ‘황박사였어…….’ 어딘지 조금 실망한 것 같은 목소리는 역시 블루, 그 옆에서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쉰 것은 블랙. 레드는 점점 더 자신이 아주 초현실적이고 몹쓸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드의 그런 의심은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슬라이드에 잘 만든 PPT가 돌아가면서 오히려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을 소집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슬라이드를 보면서 함께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황박사라는 그 사람은 PPT의 화면을 등지고 선 채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슬라이드에 비친 PPT 화면에는 지난 며칠간 TV에서 자주 보이던 익숙한 물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옐로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거, 나로호에요?”
  레드는, 붕장어처럼 눈을 껌뻑이며 한참 동안 슬라이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호, 맞네.

  지금 당장 쓰러져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창백한 안색의 황박사는 한 시간 이십 여분에 달하는 긴 시간 동안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섞어가며 사건의 발생과 이 사건이 야기할 문제점을 통해 짚어보는 현 사태의 중요성, 그리고 대북정책과 그 이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깐, 잠깐만- 그렇게 말하며 황박사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블랙이었다. 블랙은 슬라이드와 황박사, 그리고 서울 시장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대북정책이 왜 나오는 거죠? 설마…….”
  “역시 블랙, 이해가 빠르시군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게 말하던 서울 시장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리수레인저 여러분.”
  시장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있었다.
  “나로호는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나로호는…….”
  슬라이드가 넘어가고, 인공위성 사진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리 높지만은 않은 건물들로 꽉 들어찬 도시를 상공에서 찍은 듯한 그 사진의 중심에는 낯설지만 익숙한 동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장은 피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로호는 북한에게 도난 당했습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회의실 안에 블랙의 목소리가 다시 쨍하고 울렸다.
  “북한의 짓이라니, 그럼 발사 당일 폭발한 그건 뭐였습니까? 왜 정부는 국민들에게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은 거죠?”
  “마, 맞아요. 우리 모두 분명히 나로호가 발사되는 걸 봤단 말이에요! 폭발 소식도 인터넷 생중계로 보고 있었는데…….”
  핑크의 지원사격에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이 그날 보신 것, 그것도 분명 나로호입니다.”
  “네?”
  “다만 그건…… 가짜라고 할까요, 일종의 더미(dummy) 같은 거였지요. 나로호 개발 과정에서 실패했던 부품들을 모아 급조한 더미 로켓이었습니다.”
  “그럼 납치됐다는 건…… 북한은……?”
  더듬더듬 말을 잇는 옐로의 얼굴은 당혹으로 물들어있었다. 레드는 점점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안돼, 이쯤 되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의 이야기가 아니야……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고 싶은 기분에 시달리는 레드의 귓가에 착 가라앉은 시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황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정황증거만이라고는 해도 그들이 한 짓을 의심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천안함을 잊었습니까?”
  블랙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일 테지. 그러나 시장은 블랙이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왜 국민들에게 공표하지 않았느냐…… 보십시오, 아리수레인저 여러분. 5천억입니다. 자그마치 5천억의 세금입니다. 나포된 선박 따위와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단 말입니다. 안 그래도 정부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종자들이, 눈뜨고 5천억짜리 위성을 도둑맞았다고 하면 가만히들 있겠습니까? 그럴 바에야 나로호는 차라리 실패로 남는 게 좋다는 것이 위쪽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의견을 지지하고 말이죠.”
  “그러나…….”
  “젠장, 같은 말을 자꾸 하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애초에 그들이 나로호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우린 지금쯤 성공한 위성을 보유하고 있었겠죠. 내가 여러분과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다산 콜센터 직원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게 답변해줄 일도 없었을 테고 말입니다.”
  시장의 격앙된 목소리에 레인저들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회의실 안에 감돌았다. 그때였다.
  “그럼,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뭐죠?”
  어눌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드였다. 레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아랫배를 감싸 쥔 채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장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체념 섞인 표정으로 황박사에게 손짓했다. 황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슬라이드를 가리켰다.
  “나로호를 되찾아오면 됩니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신음들은 레드를 그나마 덜 불행하게 했다. 레드는 어이없는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블랙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현실감각을 되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핑크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뛰쳐나가려다 검은 옷의 사내들에게 붙들려 억지로 자리에 앉혀졌고, 옐로는 멍한 얼굴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블루는 하느님 부처님을 불러대며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나로호를, 되찾아오라고.
  “아리수레인저의 공식적인 첫번째 임무는 나로호 회수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시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리수레인저가 그들의 첫 임무를 위해 제9호 땅굴에 들어선 것은 아르헨티나와 독일의 월드컵 4강전이 있는 날이었다. 블루는 울상이 되어 이런 빅매치를 놓칠 수 없다고 한탄했지만 애초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투정이었다. 황박사의 안내를 받아 태백 근처에 모인 레인저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박사는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무전기를 통해 어딘가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 블루는 자신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전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보다 못한 블랙이 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윽박을 지르고 나서야 블루는 자리에 앉았지만 그 얼굴에 가득한 불만은 가시지 않았다. 옐로가 안쓰러운 얼굴로 블루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운받아서 보면 되잖아요. 옐로의 말에 블루도, 블랙도 눈을 홉떴다. 핑크는 코웃음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어둑어둑하니 땅거미가 지는 산자락 어귀에 들어선 트럭이 우뚝 멈추었다. 황박사는 무전을 끊고 멤버들의 얼굴을 쭈욱 둘러보았다.
  “다 왔네.”
  “여기가 그…… 땅굴입니까?”
  황박사는 대답 대신 차에서 내렸다. 레인저들은 서로의 얼굴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리더가 먼저 내려야죠.”
  그렇게 말한 것은 핑크였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레드는 위가 점점 더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제9호 땅굴의 입구는 아래쪽일세. 다른 땅굴들과는 다르게 제9호 땅굴은 북한의 군사지역에 바로 이어져있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곳이니 조심하도록 하게.”
  조심하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 블랙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황박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트럭에 동승했던 검은 정장의 남자 둘이 황박사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하더니 아래를 가리켰다. 황박사는 철조망이 둘러진 주변을 한참 서성거리다 ‘군사지역-민간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철문을 열고 손짓했다.
  “제9호 땅굴을 따라 들어가면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북한의 군사시설로 직접 잠입이 가능하다고 하네. 위성지도를 자네들에게 준 PDS에 담아두었으니 확인하면서 임무를 진행하도록.”
  “저…… 박사님?”
  옐로가 손을 들어 황박사를 불렀다. 황박사가 연 철문 너머에는 폭이 좁은 돌계단이 하염없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황박사는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근엄하게 되물었다.
  “뭔가, 옐로?”
  난 저 늙은이가 정치인이라도 되는 것마냥 거만하게 구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요. 블랙의 속삭임에 레드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옐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백팩을 한쪽 어깨에 둘러맨 채 황박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박사님은 이 땅굴에 들어가보신 적이 있나요?”
  “땅굴은 모두 국가기밀일세.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네.”
  “어쨌든 그럼 누군가는 들어가 본거죠?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고 그런 건…… 아니겠죠?”
  황박사는 본격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땅굴은 국가안보부 소관일세.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뒀을 테니 걱정 말고 자네들은 들어가서 하라는 대로 하면 그만이야. 어서, 서두르라고.”

  해야 할 일에 비해 작전지시는 대책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제9호 땅굴을 통해 북한 군사시설로 잠입하여 나로호의 위치를 알아낸다. 위치를 파악한 즉시 그곳으로 이동하여 나로호를 되찾아온다는 것이 이번 나로호 구출작전의 요지로, 레드는 작전지시를 듣고 난 후 시청 내 의무실로 달려가 위장약을 한 움큼 집어왔다. 해커인 블루, 투시력이 있는 핑크, 순간이동능력이 있는 옐로가 없다면 절대로 실행 불가능한 작전이었다. 레드는 일렬로 땅굴을 내려가고 있는 멤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블랙에게 속삭였다.
  “해커에 초능력자라니, 지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일까요……?”
  “뭐 생각해보면 정부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민간인들을 엮어서 레인저니 뭐니 만들 이유가 없죠. 오히려 전 안심했습니다.”
  “그럼 지금 해커니 초능력자니 하는 말들을 믿는다는 얘깁니까?”
  “못 믿을 건 또 뭡니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뭔데요?”
  블랙의 말에 레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침묵했다. 땅굴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블랙, 당신 능력은 뭡니까?”
  시비조로 던진 레드의 질문에 블랙은 잠시 멈춰 서서 빙긋 웃어 보였다.
  “저요?”
  “그래요, 당신.”
  “당신이랑 같습니다. 낙하산이죠.”
  “…….”

  괴괴한 굴 안은 습기 때문인지 심하게 더웠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위성지도로 확인한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던 핑크가 갈증을 호소하자 블루가 등에 맨 백팩을 가리켰다. 백팩 안에는 지급품으로 담긴 아리수가 있었다. 핑크는 허탈한 얼굴로 뚜껑을 따 물을 마셨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문득 레드는 꾸룩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가 과연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대해진 그 소리는 웅웅거리며 귓바퀴를 쓸어 담고 있었다. 레드가 괴로운 얼굴로 귀를 막자 조심스레 전진하던 다른 멤버들이 레드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블루가 걱정 어린 얼굴로 레드를 불렀다.
  레드, 괜찮아요?”
  “으으…… 배, 배가…….”
  “배?”
  레인저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레드를 바라보았다. 배가 아프다니 갑자기, 이런 중요한 상황에?
  “으…….”
  “괘, 괜찮아요?”
  “위험해…… 나올 것 같아…….”
  “나오다니, 뭐가요!”
  핑크의 목소리는 숫제 비명과도 같았다. 어두운 땅굴에 핑크의 목소리가 쨍하고 깨질 듯 울려퍼졌고, 레드는 아랫배를 감싸안은 채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가…… 너무 아……파…….”
  “뭘 먹었길래 이래요? 아니 임무 중에 배탈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리더잖아요, 정신 차려봐요.”
  “으…… 그럴 수 있었으면 애초에…… 애초에 어떻게든 했을 거야…….”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려가며 간절하게 자신들을 바라보는 레드의 눈빛은 진지했다. 기가 막혀 할말을 잃은 레인저들이 서로의 얼굴만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부그르르- 이제는 레인저들의 귀에도 명확히 들릴 정도로 심상찮은 소리가 레드 뱃속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이쯤되면 사색이 된 것은 레드보다는 다른 레인저들이었다.
  “아- 진짜! 어차피 땅굴인데 그냥 여기 어디 대충 싸요!”
  “옐로, 핑크? 혹시 휴지 같은 거 있어요?”
  “화장솜은 있는데…….”
  레드의 미간에서 식은땀 한방울이 주르륵 흘러 뺨을 타고 턱에 맺혔다. 예전부터 자주 배탈이 나기는 했지만 이렇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렇게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레드는 임무를 완료한 후 다른 레인저들이 자신에 대해 내릴 평가가 두려웠다. 완전 무능력하지 뭐에요, 저런 걸 리더라고……. 시장님 우리 리더 바꾸면 안 될까요? 맞아요. 같은 낙하산이라면 블랙씨가 더 리더에 어울려요. 음…… 솔직히 레드씨는 리더에 좀. 레인저들이 혀를 끌끌 차며 내부평가서에 자신을 비난하는 코멘트들을 적어넣는 상상을 하던 레드는 크게 도리질 쳤다. -사실, 그는 이전에 시청을 방문한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친절도 조사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받아 근무태도평가에서 감점당한 전적이 있었다-.
  “아…… 차라리 날 두고 가…….”
  비장미 넘치는 레드의 말에 레인저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레드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구렁이처럼 몸을 배배 꼬며 레인저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영화에서 보면 항상 이런 식으로, 레드는 눈을 질끈 감아 한층 더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식으로 팀원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 “날 두고…… 임무를 수행…….” “뭐야, 말하는 게 수상한데? 꾀병 아니에요? 지금 같이 가기 무서우니까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뾰족하게 날아드는 핑크의 말에 옐로가 흐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진짜에요?” 레드는 벙찐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뭐라고? 생각한 거랑 반응이 틀린데?
  블루가 레드의 손을 잡아 끌었다. 레드의 뱃속에서 토네이도가 불든 허리케인이 불든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레드는 황망히 땀만 죽죽 흘리며 그 손길에 붙들리듯 억지로 일으켜세워졌다.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가야지요. 하나로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게 아리수레인저의 정신 아닙니까.”
  대체 언제부터 그런 정신이 있었다고? 그렇게 반문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레드는 레인저들의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불신이 묻어났다. 습하고 퀴퀴한 땅굴에 자욱히 깔린 어둠과 플래시 빛에 의지해서 번들거리는 레인저들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레드는 그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깨달았다. 부글부글, 뱃속은 여전히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난파 일보 직전이었다. 레드는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올렸다.
  “알았……, 알았으니까…… 제발 나 화장실 좀…… 배 아픈건 진짜거든요……?”
  국군 앞에 항복하는 인민군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신을 적처럼 바라보는 레인저들의 시선에 묶여 체념하듯 손을 들고 제발 화장실 좀 가자고 하소연하는 자신의 꼴이 퍽 한탄스러웠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레드가 끙끙거리며 간절하게 레인저들을 바라보자 블루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짜 배가 엄청 아픈 모양인데요…… 어떻게 하지. 아, 맞다 옐로!”
  “네?”
  난데없이 지목당한 옐로가 얼떨떨한 얼굴로 블루를 바라보았다. 블루는 옐로를 가리키며 해맑은 얼굴로 외쳤다.
  “옐로는 순간이동을 할 수 있잖아요. 옐로가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레드를 데려다주면 어때요? 그리고 같이 여기로 돌아와서 임무를 마저 수행하고, 그럼 되겠다 그쵸?”
  “그럴싸한데?”
  블랙이 구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옐로를 돌아보았다. 옐로는 어머, 어머 하는 소리만 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래도, 화장실이라니……. 레드씨랑요? 얼굴이 발갛게 익은 옐로가 도리질쳤다.
  “하지만 순간이동을 하려면 화장실이 어디있는지 알아야해요……. 막연히 아무 곳으로나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으음……. 그냥 상상만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이거군. 복잡한데.”
  갑자기 문제에 봉착한 레인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임무 수행은 접어두고 당면한 레드의 화장실 문제 해결을 위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레드는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댈 뿐이었다. 더구나 저 문제를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특히 웃겼다. 블루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때였다.
  “옐로, 여기서 가까운 곳에 화장실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위치를 어느 정도 가르쳐주면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겠어?”
  핑크의 말에 옐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가까운 곳이라면…… 자세히 가르쳐주시면, 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가능할 거에요. 근데 어떻게…… 아, 투시력!”
  핑크는 관자놀이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간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땅굴벽 근처로 다가갔다. 축축하니 이끼까지 낀 땅굴벽을 왼손으로 쓰다듬던 핑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앞으로 4km…… 거리는 그 정도 될 거야. 대롱처럼 좁지만 넓은 공간, 강철로 만들어진 화장실이 보여…… 비데까지 있는데?”
  “그곳의 생김새를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핑크씨?”
  핑크와 옐로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거의 혼절 직전에 이른 레드는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꽉 떴다. 블랙이 한심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내 당신 같은 사람들을 잘 알아요. 꼭 운동회 전날 배탈이 나고 웅변대회날 설사가 나는 사람들이지. 그래도 기적적으로 이 땅굴 주변에서 화장실을 찾았다고 하니 어떻게든 버텨봅시다. 당신도 평생을 살면서 제대로 임무 한번쯤은 성공해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으……, 난…….”
  “비데도 있다잖습니까. 화장실을 찾아주는 끝내주는 미녀 동료도 있고, 화장실까지 옮겨줄 귀여운 동료도 있고 말이죠. 당신은 운이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집중하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옐로가 레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요?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O사인을 만든 옐로는 수줍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블랙은 레드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눈을 찡긋거렸다.
  “화장실 가서 시원하게 비우고 오시라구요. 그리고 다음 임무 때는 배탈없이 갑시다.”
  그에게 떠밀려 레드는 옐로의 손을 잡았다. 긴장 때문인지 축축하게 젖어있는 손바닥이 매끄럽게 찰싹 달라붙었다. 옐로가 숨을 들이키며 조용히 속삭였다.
  “눈만 한번 감았다 뜨면 되요. 그냥 절 믿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니, 말이 쉽지.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레드는 눈을 감았다. 블루가 블랙에게 속살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중량감이 모두 사라졌다. 블루는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거봐요, 아리수 그거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함부로 마시면 안된다니까요. 내 보기엔 배탈난 거 그 때문일걸요.” 
  야, 핑크도 마셨거든? 그렇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레드는 눈을 뜬 순간 다리가 풀려 그대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저, 저, 정말…….
  “제 생각보다 훨씬 좋네요……. 어맛, 어서 볼일 보고 나오세요!”
  주저앉은 레드의 등을 옐로가 마구 떠밀었다. 레드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자신의 눈 앞에 놓인 문을 바라보았다. ‘W.C’. 정말,
  “정말 화장실이네……?”

  레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장실의 문을 닫아걸었다. 옐로는 여전히 귀뿌리까지 빨개진 채 밖에 서 있었다. 널찍한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화장실로 쓰이기엔 쓸데없이 넓었다. 머뭇거리며 화장실의 문을 닫은 레드가 뒤로 돌아서자 한참 뒤쪽에 덩그러니 놓인 순백색의 변기가 보였다. 과연, 핑크의 말마따나 비데까지 달린 최신식 고급변기였다. 레드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간첩들이 들락날락거리는 제9호 땅굴 인접지역에 이런 초호화 화장실이라니. 그러나 레드의 배는 그가 그렇게 넋놓고 이 쌩뚱맞은 화장실을 관찰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부그르륵, 부글! 한층 더 심하게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낑낑대며 거의 기어가다시피 변기에 앉아 바지를 내린 레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명색이 레인저면서 쫄쫄이 타이즈를 입지 않아도 되는 아리수레인저에 대한 고마움이 문득 머리를 스쳐 레드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전대물에 나오는 것 같은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면 아마 바지를 벗다가 이미 싸버렸겠지.
  변기 위에 엉덩이를 얹는 순간, 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을 수 있었는지 상상도 되지 않을 기세로 배설물이 쏟아져내렸다. 푸다다닥 푸닥푸닥, 밖에서 듣고 있을 옐로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가 뇌성벽력처럼 터져나와서 그만 레드는 얼굴이 시뻘겋게 익고 말았다. 당황과 부끄러움에 고개만 이리저리 두루미처럼 빼어 보던 레드가 변기 옆에 놓인 리모컨과, 변기 앞쪽 매끄러운 벽에 매달린 거대한 벽걸이 TV를 발견한 것은 배설물을 한 양동이쯤 뱉어내느라 엉덩이가 화끈거릴 때였다.
  “화장실에 벽걸이 TV라니, 이거 무슨 재벌 화장실이라도 되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레드는 무심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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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코, 화면이 갑자기 켜지며 시퍼런 그라운드가 나타났다. 축구? 블루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아르헨티나 대 독일의 월드컵 경기였다. 화면 안에서 건장한 청년들이 공 하나를 쫓아 바쁘게 움직였다. 레드는 화면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괄약근이 조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닫힌 문 너머로 옐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레드는 화들짝 놀라 급하게 바지를 추슬러올렸다. 싸다만 듯, 닦다만 듯 찜찜한 기분이 참을 수 없었지만 옐로의 비명소리가 그를 급하게 만들었다. 레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지를 부여잡은 채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옐로, 괜찮……!”
  “……!”
  “…….”
  싸아한 침묵이 모두의 머리 위를 감쌌다. 철커덕, 철컥. 장전된 장총이 자신의 미간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레드는 싸다 만 똥이 밀려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옐로는 이제 그냥 마음 편하게 기절하고 싶어하는 듯 보였다. 인민군 복장을 한 두 명의 남자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에 선 안색 나쁜 남자가 레드와 옐로를 번갈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콧등 위에 걸쳐진 안경이 번쩍 빛났다.
  “……남조선 동무들이 예서 뭣들하는기요?”
  그의 표정에서 담뿍 묻어나는 짜증은 국방위원장으로서 대적자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보기엔 지극히 소소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아주 사적인 권리를 방해받은 데 대하여 짜증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이 뛰쳐나온 공간을 돌아보았다. W.C……. 문 아래 번쩍거리는 황금 플레이트, 아까는 보지 못하고 지나친 그 플레이트에는 정교하게 수놓아진 봉황의 문양과 함께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레드는 느즈막히 깨달았다. 저 화장실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황량한 감이 없잖아 있는 넓고 좁은 대롱 같은 커다란 공간을 밖에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지금 이 순간에야 겨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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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속에서 폭발하던 로켓, 지하회의실에서 몇번이나 반복해서 본 그 로켓, 사실은 KSLV-I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 로켓이 그곳에 당당히 서 있었다. 레드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나로호…….”
  옐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무례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레드 역시 딸꾹질을 시작했다. 전염처럼 퍼진 딸꾹질에 시달리는 레드와 옐로를 지켜보던 국방위원장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화장실의 문을 닫았다.
  그랬다, 화장실이었다.
  나로호는 화장실이었다

*

  “조직 내부의 문제라는 게 결국은 다 이런 거지. 극비인 사항들에 대해서 서로간에 어느 정도 공유가 있어야 하는데, 분리된 독립기관들은 그런 점에 있어서 대단히 편협하거든.”
  시장은 대단히 미안해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레인저들은 시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 위쪽은 그런 점에 있어서 특히 더하단 말이오. 무슨 일을 추진을 해서 결말을 지었다 하면 이게 아래쪽으로도 언질이 와야 하는데, 상부라는 게 워낙 독단적인 조직이다 보니…… 자기들 멋대로 일 처리를 해버리고, 또 이게 워낙 민감한 사항이고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겨버렸지 뭡니까. 정말 이번엔 우리도 보기 좋게 속은 거죠. 그래도 생각들 해봐요. 원래 로비라는 게 그렇게 드러내고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덕분에 대북문제로 초긴장 상태였던 것도 어느 정도 좋게 결말이 날 듯하니 좋고 좋은 일이지요.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어쨌든 가장 먼저 저기 북한을 의심하는 게 이 나라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버릇이 되어놔서. 그래도 결국 나로호가 북한에 있었던 건 맞지 않습니까. 선물로 갔든 도둑을 맞았든 말이에요. 여하튼, 여러분들이 헛수고하게 한 건 정말 미안합니다. 내 이렇게 사과하지요.”
  황박사가 변죽을 맞추듯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어두컴컴한 서울시청 아래 지하회의실에는 쥐 죽은 듯한 침묵만이 어둠처럼 깊게 깔려있었다. 시장은 흥미를 잃은 얼굴로 슬라이드의 스위치를 껐다. 픽 소리와 함께 죽어버린 화면 위로 희끄무레하게 나로호의 잔상이 남아있다 이내 사라졌다.
  “그러니까 그렇게들 아시고……”
  각자의 앞에 놓여 있던 종이가 검은 정장의 남자들을 통해 회수되었다. 각서, 라고 쓰인 굵은 글씨 밑으로 레인저 각자의 본명과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지장이 찍혀 있었다. 핑크가 흑,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입 다물고 다시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서 살면 됩니다…… 알겠습니까들? 우리가 다 지켜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얘기는 굳이 할 필요 없이 그냥 조용히…… 알겠지요?”
  낮은 목소리가 회의실을 떠난 후에도, 레인저들은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컴컴한 회의실 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 사이로, 기어코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 핑크가 뛰쳐나갔다. 흑흑, 우는 소리와 크응, 코 푸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이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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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렇게, 아리수레인저를 추억하는 마지막 기억으로 지축을 울리는 화장실 소리만을 남긴 채 그들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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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진
소설 같은 일에 휘말려 살기 지겨워서 소설을 쓰기로 하다. 아직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글은 초등학교 때 쓴 과학독후감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보다 개 같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 인생의 종착역에서 자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작가’라고 부를 수 있기를 소망 중.

* 해당 사이트에 게재된 ‘소닉 노블’의 저작권은 일회용 라이타에 있습니다

Author
instantwriter 일회용 라이타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페이지 단편소설에서 활동 중인 9명의 라이터가 결성한 '실험적 쓰기'를 좇는 집단이다. 학생, 회사원, 사업가, 웹디자이너, 경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시선으로 서울 픽션워크샵을 통해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공개된 작품으로는 '화목빌라, 402호 배수연의 죽음 http://villa402.web-bi.net'이 있다. 홈페이지: http://realwriter.lil.to

4 Responses
  1. 배추김치 배추김치 says:

    발상의 전환이란게 이런거구나!하고 읽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나로호에 대한 매우 객관적인(?) 비평을 곁들인 초입부를 읽을때만 해도 그저그런 정권 비꼬기가 되려나 하는 우려를 품었던 것도 잠시, 한문단만에 저의 어설픈 선입견을 시원하게 타파하며 비밀가득한 모험의 세계로 인도해주신 필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중간 중간 예상치 못한 대목에 잠복해있던 반전이 톡톡 튀어나오면서 그전까지 화자의 관점에서 성립되었던 세계관을 단숨에 전복시켜버리는 연출이 기법적으로 무리없이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 굉장히 인상깊네요. 사소한 반전이라도 이정도로 효과적으로 구사되면 종국에는 어지간한 추리소설 못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유도하게 된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소설적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절대 거만하지 않은 담박한 분위기가 개인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진 님의 다작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 류예지 류예지 says:

      배추김치 님. 답변이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민감한 정치적 요소나 용어들의 사용으로 이 글을 쓴 진 님이 올리기 전에 많은 걱정을 했는데, 그 우려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시원한 덧글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이번 주에 소닉 노블 연재가 끝나는데 마지막까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 독자 독자 says: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도 느끼지 못하고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네요. 짧지만 치밀한 구성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튀어나오는 생각지도 못했던 기발한 설정들이 아주 즐거웠어요.
    요즘엔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흔한 주제가 되어버렸는데 흔하다면 흔한 주제를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갈 수 있다니 발상이 아주 신선하네요.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진님의 글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류예지 류예지 says:

      역시 찌는듯한 더위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라는 말에서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물론 제 글은 아니었지만요ㅠ.ㅠ) 앞으로도 일회용 라이타의 서투르겠지만 꾸준한 횡보에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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