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은하철도의 밤

‘소닉 노블’ 연재를 즈음하여

소설은 텍스트와 여백이라는 평면적인 구도 위에서 정제된 언어로 표현된다.
일상은 현실이라는 입체적인 구도 위에서 능동적인 상황으로 구현된다.

의미가 있는 단어와 문장의 나열인 ‘소설’에 일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써 기능하는 날 것의 ‘소리’를 개입시킨다면 어떤 기상천외하고 낯선 일이 벌어질까? ‘소닉 노블’은 이런 단순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됐다.

기본적으로 Sound@Media 웹진의 SeoulSoundMap 이라는 캠페인에 올라오고 있는 음원을 재료로 소설을 썼다. 올라온 음원 중 소설의 콘셉트에 맞게, 혹은 음원의 성질에 따라 사용했음을 밝힌다. 그대로 쓰는가 하면, 믹싱을 하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음원은 한편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기도 했고, 단순한 재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기도 했다. 텍스트와 소리가 어느 쪽에도 기대지 않고 소설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지만, 그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기란 어려웠다. 형태적으로는 소설 곳곳에 선택된 음원의 플레이 바를 인배드해서 텍스트와 음원을 한 공간에 배치했다.

8명의 작가는 일상의 소리를 언어라는 도구로 표현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를 소설에 개입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에 집중했다. 유기적으로 얽혀드는, 혹은 이질적으로 밀어내는 지점에 되도록 낯설어하지 않고, 그것을 신선하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게 반영하려 노력했다.

  시계가 자정을 알렸다. 복장을 갖춰 입고 나는 대합실로 들어섰다. 내 뒤로 윤 군이 따라 들어왔다. 윤 군은 나와 같은 교대 근무자다. 영내 근무만 하던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운행 팀에 배치되어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그런 그 앞에서 나는 부러 과장되게 하품을 했다.
  “집이 이 근처라고 했던가?”
  “네. 집중국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입니다.”
  “당분간 식구들 못 볼 텐데, 인사는 하고 나왔겠지?”
  윤 군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혈기왕성할 나이의 윤 군과는 몇 마디도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진작부터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모처럼 둘만 있게 된 차에 이것저것 묻게 되었는데, 윤 군으로서는 나를 성가신 선임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애인은?”
  “에? 아직 없습니다.”
  “아니, 여태 안 만들고 뭐했어?”
  “그게, 아직은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일 배우느라 정신없기도 하고…….”
  그 즈음 내가 주제넘은 참견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더 놀리려다 관두었다. 대신 나는 소리 내어 한 번 웃었다.
  “이봐.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우리는 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그, 그렇습니까.”
  “골치 아픈 것들을 배워두긴 했겠지만 그게 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거고, 수동 조종을 하는 상황에 처한 적은 여태까지 한 번도 없어. 출발이고 도착이고 다 기계가 알아서 해주는 거야. 그러니 우린 그저 반 년짜리 휴가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된단 말이지.”
  그렇다고 긴장이 너무 풀어져서도 곤란하다. 나는 짧게 덧붙였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처음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좀 있어. 컴퓨터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를 해야 하거든. 불이 순서대로 들어오는지 보고 있다가 아니다 싶으면 본부에 일러바치는 거야. 인간이 기계를 감시한다니, 뭔가 주객이 뒤바뀐 것 같지 않아?”
  피식, 윤 군이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말이야, 이제 곧 출발할 텐데 잠은 푹 자뒀나?”
  “아무래도 처음이라 잠을 좀 설쳤습니다.”
  우주복을 덜그럭거리며 우리는 긴 회랑을 걸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는데 말입니다. 밤에만 출발하는 이유는 뭡니까? 야간 교대라고는 하지만 주간 근무는 아예 없잖아요.”
  그래, 그건 이유가 있다.

  2세기 전, 우편집중국은 지구와 식민행성 간의 택배 및 서신 왕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화물 전용 우주선을 도입했다. 기존의 셔틀을 컨테이너가 분리되도록 개량한 것이다. 행성마다 들러 화물칸을 교체하는 방식인데 그러한 개념이 얼핏 기차를 연상케 했다.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멋대로 은하철도라고 불렀고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죄다 999호라는 애칭이 붙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은하철도라면 응당 밤에 떠나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힘을 받더니, 반세기 전 처음으로 야간 출항을 하기로 한 것이다. 시범 출항이었음에도 호응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신문마다 대서특필됐다고 전해진다. 집중국 개국 사상 초유의 흥행으로 말미암아 이후 은하철도는 야간에만 편성되었으니 이건 순전히 낭만의 문제다.
  “낭만은 개뿔…….”
  우리들, 그러니까 실무 담당자들이 아니꼽게 생각하는 것도 지당하다. 근무 시간이 바뀐 이유가 고작 그런 것이라니 불만이 나올 수밖에. 배부른 작자들이나 낭만을 찾고 운치를 찾는 거다. 감히 엄두도 못 내는 배송료 앞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버거운 중산층 서민들은 은하철도가 낮에 떠나든 밤에 떠나든 아무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편지 한 통에 기본요금이 차 한 대 값이면 말 다 했지.”
  항간에는 은하철도의 빛줄기가 소원을 이뤄준다는 얘기도 있으나, 정작 그 빛줄기를 내는 장본인의 간절한 소원은 밤에는 잠을 푹 자고 낮에 출항하는 것이다. 바라건대 소원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내 것부터 조속히 이루어 달라.
  나는 7-8구간의 선임 기사로, 7구역과 8구역을 왕복하며 화물의 선적부터 하역까지 담당하고 있다. 거의 모든 작업을 기계가 한다고는 하나 만에 하나라도 일이 틀어지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게 넘어온다. 어쨌거나 이 일을 벌써 십오 년째 해오고 있으니 이제는 이골이 날 지경이다. 그래도 6개월 만의 귀향에 내심 설레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늘 그렇듯 셔틀은 무사히 발사되었다. 무사히 궤도에 진입한 것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당분간은 할 일이 없다. 우리는 창 너머로 별들을 보며 연신 하품을 했다. 하품투성이의 낭만이라니.
  “자, 이제부터는 편하게 가자.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예. 잘 부탁드립니다.”
  우주에서의 생활은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읽을거리를 충분히 챙겨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침저녁으로 붙들고 읽다 보니 석 달째에 동이 났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생각은 없어, 나는 명상에 도움이 되는 호흡법을 개발하고 때로는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을 편지를 썼다 지우며 시간을 보냈다.
  따분한 건 윤 군도 마찬가지였다. 여가를 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 그에게 내 책을 빌려주기도 했으나, 불행히도 우리는 독서 취향이 달랐다. 그래도 우주 생활의 무미건조함에 금세 적응한 그는 조종간을 비우기 일쑤였다. 우리는 충분히 친해지긴 했지만 늘 붙어있지는 않았다. 마주 앉아 대화를 하다가도 몸이 근질근질해지면 그는 이따금 화물칸을 헤집고 다녔다. 소포상자로 탑을 쌓거나 정돈을 새로 하거나 하며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도착이 머지않은 어느 날 윤 군이 게임을 제안했다.
  “최 차장님도 운동하실 겸 같이 해요.”
  “어떻게 하는 거라고 했지?”
  “소포마다 간략히 품목이 적혀 있잖아요? 제가 대충 훑어보니까 종류가 아주 각양각색이더라고요. 더 재미있는 소포를 찾아오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누가 더 재미있는지는 누가 결정하는데?”
  “어차피 심심풀이로 하는 건데 아무렴 어때요.”
  “그렇군.”
  그리하여 게임이 시작되었다. 종일 화물칸을 뒤져서 윤 군이 꺼내온 소포는 박제된 강아지였다. 말 그대로 애완견을 박제해서 소포로 보낸 것이었다. 소포를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죽은 견공이 어떤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건 상관없었다. 윤 군이 주목한 것은 배송 유의사항에 적힌 메모였으니까.

  <반송 시 그냥 근처에 묻어주세요>

  나도 소포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였는데,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다고 적혀 있었다. 윤 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소포의 어느 부분이 웃긴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웃기는 건 바로 이거지.”
  나는 수신인난의 주소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8구역의 주소였다. 그제야 윤 군도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향하고 있는 8구역은 각종 광물의 산지로 유명한데, 소포의 배송지가 하필이면 다이아몬드 광산 부근이었던 것이다.
  “누군지 심보 참 고약하네요.”
  “살피다 보니 이런 것도 있던데.”
  나는 우편 행낭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겉봉에 휘갈긴 <성적표 재중>과 <본가입납>이라는 글씨가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묵직한 비감을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본가입납’ 부분은 잉크가 얼룩져 있었다.
  “이건 어쩐지 슬픈데요.”
  “누가 그러더군.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아차차. 그럼 제가 보는 법이 틀렸군요.”
  윤 군은 두어 발짝 물러나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런다고 편지가 갑자기 우습게 보일 리 없었다. 문득 내 곁에 놔둔 행낭 속에서 봉투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엇, 그건 뭐예요?”
  실은 소포더미를 뒤지던 중에 눈에 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크라프트지 서류봉투를 반으로 접어 셀로판테이프로 둘둘 감은 소포였다. 품목은 간이 재생 디스크라고 적혀 있었다. 주소를 보니 우리 집 근처였으므로 내가 아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웃집 소포라 직접 가져다주려고 챙겼어.”
  “그래도 됩니까?”
  집중국에 하역하고도 배송이 끝나기까지는 통상 보름이 더 소요된다. 더구나 일반우편으로 보낸 것이라면 달포를 넘기기도 예사다. 하지만 내가 가져다주면 당일에 바로 받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웃의 편지를 공짜로 보내주는 것까지는 못할지언정 집중국 직원으로서 이 정도 편법은 관례상 묵인되었다.
  “이미 많이 지연됐어. 우편 소인을 봐. 접수날짜가 무려 칠 년 전이라고.”
  휘유, 윤 군이 휘파람을 불었다.
  “칠 년짜리 사연치고는 한참 가벼워 보이는데요.”
  “보낸 쪽에선 보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지도 모르지. 드문 일은 아니야. 일반우편으로 보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더군.”
  “누가 보낸 걸까요? 옛 친구? 헤어진 애인?”
  아니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이다. 김 형의 여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김 형과 나는 단순한 이웃이 아니다. 술친구로서 우리는 제법 친했다. 그는 말술이라 원체 취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번갈아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에도 소포를 전해준다는 명목으로 만나서 술판을 벌일 요량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지만 그는 나를 꼬박꼬박 최 형이라고 부르며 존대했다. 김 형은 특히 이주 전의 삶에 대해 늘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나는 이주민 3세대라 8구역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는 5차 이주 때 새로 유입된 개척민이라 다른 별에서 유년을 보냈을 터였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캐물었으나, 본토 출신이라는 것만 슬쩍 말해주었을 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내 궁금증은 결국 해갈되었다. 오랜 가뭄이 끝난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하루 종일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단골 술집에 들어서니 구석자리에 구겨져 있는 김 형이 보였다. 그는 얼큰히 술이 올라 있었다.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취한 모습은 처음 봤다. 컵을 닦고 있던 바텐더가 내 놀란 표정을 알아보았다.
  “정오께부터 시작하셨어요. 모처럼의 휴가라고 아예 술병을 궤짝째로 모셔다놓고…….”
  “어-이, 최 형! 이리 와서 같이 한 잔 해요.”
  김 형이 나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내가 다가갔다.
  “대낮부터 무슨 술을 그리 마셨어요?”
  “기분이 좋아서 그래, 기분이.”
  내가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휴가를 받아서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그는 되뇌었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였다. 광산 채굴자인 김 형은 비가 오면 일을 쉰다. 갱도 붕괴 위험이 있어 작업이 중단되는 것이다. 그러면 광부들은 회식을 하거나 비가 그칠 때까지 집에서 잠을 잔다. 김 형은 혼자 궁상을 떨고 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
  “저를요? 비를요?”
  그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눈가의 주름이 깊게 패었다.
  “혼자 마시면 재미가 없거든.”
  반나절을 홀로 마신 사람이 할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김 형은 자, 한 잔 받으쇼, 라며 내 잔에 코냑을 부었다. 갑자기 웬 코냑이에요, 했더니 오늘은 좋은 술을 마실 만한 날이라고 했다. 싸구려 술만 털어 넣던 입이 갑자기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잔을 부딪치자 술이 찰랑거렸다. 우리는 동시에 잔을 비웠다.
  “내가 내 동생 얘기 한 적이 있던가? 없던가?”
  “형님한테 동생이 있다고요?”
  있지, 있고말고. 그가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다섯 살 터울 동생이 있지 않겠어요. 명신이라고, 여동생이지.”
  그렇게 말문이 터지고야 말았다. 쏟아지는 비처럼.
  “조실부모하고 동생이랑 나랑 둘이 지냈거든. 학교야 진즉에 그만뒀고, 밤낮으로 일해서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았어요. 걔는 거의 내가 키운 셈이지. 그래,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의지가 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명신이나 나나 혼자였다면 못 살았을 거야.”
그때쯤부터 김 형의 혀가 꼬인 탓에 몇몇 부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고된 인생사를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나는 알아듣는 척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 남자를 만나보기로 했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선한 인상이더라고요. 그때 이미 결정된 거야. 처음 보는 사내한테 시집보내기로 한 거지. 둘이 죽고 못 살겠다는데 어쩌겠소.”
잠시 발음장애로 얼마간의 사연은 다시 건너뛰고,
  “근데 우리 형편에 혼수가 웬 말이겠어요. 저쪽 집안도 넉넉지 못해서 웬만한 건 생략하자고 하는데 오빠 마음이 또 그런 게 아니거든. 근데 아무리 융통을 해보려 해도 어디 마땅히 돈 마련할 곳이 있어야지. 그러던 차에 개척민 모집 공고를 본 거예요. 그게 돈이 꽤 되더라고. 이상한 수당이 많이 붙어. 그렇게들 꾀는 거지. 이렇게까지 혹사를 당할 줄은 몰랐지만, 알았던들 별다른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여동생 결혼 비용쯤은 마련해 주자, 고 해서 예까지 와서 최 형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했다는 얘기예요. 많이는 못 해줬지만 그 정도라면 아마 둘이 살 집은 마련했을 거야.”
  “아마? 아마라뇨? 집을 장만하기 전에 떠나셨나 봐요?”
  “집이 다 뭐요, 결혼식도 못 봤지. 일단 내가 떠나야 돈이 나오니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동생 분과는 그럼 그날 이후로……?”
  “그렇죠, 뭐. 작년이 딱 십 년째였으니까 올해가……”
  김 형은 그대로 탁자에 엎어졌다. 그는 잠시 신음하더니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야. 비가 오니까 오랫동안 잊었던 노래가 생각났어. 그래서 기분이 좋아요.”
  그는 몇 번 흥얼거리다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코냑을 마저 비웠다.

  별빛 쏟아지는 밤, 은하철도는 무사히 도착했다. 윤 군은 영내관사에 묵기로 했다. 집중국에서 업무를 인계하고서 나는 발길을 재촉했다. 구불구불한 산간도로를 한참 달려 새벽 두 시에 간신히 김 형 집의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자고 있었는지 그는 한참 만에 문을 열었다.
  “어잇, 최 형. 오랜만이네. 이 시간엔 웬일이에요?”
  김 형이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짧게 악수를 했다.
  “들어와요.”
  “주무시는 걸 방해했나?”
  “아냐, 아냐. 나도 막 누웠다가 일어난 거야.”
  “잘 지냈어요? 별일 없었죠?”
  “그렇잖아도 적적했다우. 최 형이 없으니 마땅히 대작할 사람이 있어야지. 어디 보자, 최 형도 목 좀 축이러 찾아왔으려나?”
  “아, 아닙니다. 우편물 중에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길래.”
  그러면서 소포를 건넸다. 의아한 기색으로 봉투를 살피던 눈이 한순간 커졌다. 동생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김명신>

  “송구스럽게도 칠 년이나 걸렸어요.”
  꽁꽁 싸맨 포장 안에는 편지 한 장과 디스크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지?”
  일반인에게 간이 재생 디스크는 생소했다. 이는 상대방에게 음성을 들려주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따로 음원을 재생할 기계나 배터리가 필요하지 않은 디스크였다. 일회용 이쑤시개라든가 깃털처럼 끝이 뾰족한 것으로 디스크에 파인 홈을 따라 긁으면 소리가 들리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간이 재생 디스크는 우편 용도로 요긴하게 쓰였다. 디스크 자체에 재생 바늘이 첨부됨으로써 더욱 간편해진 제품이 새로 나왔으나 칠 년 전에는 이게 최신식이었을 게다.
  “일단 편지부터 읽고 있어요. 이건 내가 들려줄 테니.”
  나는 이럴까봐 미리 가져온 이쑤시개를 꺼냈다. 김 형이 편지를 전부 읽기까지 기다렸다가 연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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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뭐야, 벌써 끝인가?”
  그러나 아무리 긁어도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옆에서 묵묵히 편지를 읽고 있던 김 형이 가만히 내 어깨를 잡았다.
  “이걸로 충분해.”

명석 오빠.
소식이 늦었어요.
우체국 직원 말로는 일반 우편이니 오빠가 있는 곳에 언제 도착할 지 장담할 수가 없대요.
이르면 삼 년 후에 받을 수 있겠지만 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네요.
오빠와의 거리가 이제야 실감이 나요.
할 말이 많은데 막상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음, 오빠가 들려준 노래 기억해요?
내가 빗소리에 잠이 깨서 우는 걸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어요.
어린 나를 무릎에 뉘이고 뜻 모를 노래를 자꾸 흥얼거렸죠.
무슨 가사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멜로디는 아직도 귓가에 어른거려요.
애가 애를 낳았다고 놀려도 할 수 없지만, 이태 전에 오빠 조카가 태어났어요.
예전에 오빠가 했던 것처럼
이제 나도 비 오는 밤이면 어린 명석이를 무릎에 뉘여 그 노래를 부르곤 해요.
아이의 흐뭇한 미소를 보면서 오빠를 생각해요.
이런 걸로 오빠의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언젠가 오빠를 다시 만난다면, 아니, 꼭 다시 만나서,
그때는 진짜 보답을 하고 싶어요.

  “이걸로 충분해.”
  두 가닥 눈물이 김 형의 뺨을 흘렀다. 괜스레 머쓱해진 나는 자리를 피해주고자 조용히 현관을 열고 나섰다. 밤바람이 선선했다. 차분한 허밍을 나직이 따라 읊으며 나는 낭만에 대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멀리 은하철도가 꼬리를 길게 늘이며 검푸른 밤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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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나경
마구 샘솟던 때에는 이야기 귀한 줄 모르다가, 아무 생각도 없어진 다음에야 글을 쓰기로 결심하다.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며 아침마다 비타민 드링크 복용 중.

* 해당 사이트에 게재된 ‘소닉 노블’의 저작권은 일회용 라이타에 있습니다

Author
instantwriter 일회용 라이타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페이지 단편소설에서 활동 중인 9명의 라이터가 결성한 '실험적 쓰기'를 좇는 집단이다. 학생, 회사원, 사업가, 웹디자이너, 경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시선으로 서울 픽션워크샵을 통해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공개된 작품으로는 '화목빌라, 402호 배수연의 죽음 http://villa402.web-bi.net'이 있다. 홈페이지: http://realwriter.lil.to

4 Responses
  1. 배인숙 배인숙 says:

    무지 재미있네요. 특히 디스크 편지나, 그 편지를 읽는 방식이요.
    오랜만에 연재글을 기다리는 독자가 될것 같아요.

  2. 류예지 류예지 says:

    인숙님. 감사합니다. 첫 연재라 많이 긴장했었는데요. 힘을 북돋아 주는 첫 덧글. 앞으로 올라 올 다른 작가분들의 글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3. 독자1 독자1 says: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더 많은 이가 접할 수 있기 바랍니다.

  4. 류예지 류예지 says:

    독자 1님,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