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토킹 북: 가사, 노동

ps 연재일정

6/28(월) 01. 들어보시겠어요? Would you like to listen?
7/6(화) 02. 리스닝 컴퍼니 Listening Company
7/13(화) 03. 토킹 북: 가사, 노동
7/20(화) 04. domestic sound (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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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토킹 북: 가사, 노동
ps+이지아


ps, <토킹 북>을 위한 배열, 2010, 카세트 테이프, 가변설치

토킹 북이라는 단어는 스티비 원더가 1972년에 발표한 동명 앨범에서 따왔다. Talking Book, 거칠게 번역하자면 ‘말하는 책’ 정도가 될 이 단어들의 조합은 ‘맹인인 스티비 원더가 느꼈을, 혹은 생각했을 책은 어떤 것이었나’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책, 문자, 그리고 더 확장해본다면 이야기는 ‘말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말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수히 귓바퀴 안과 밖으로 흘려 보내는 그 말은 세계 안에서 다음과 같은 형태들로 존재하며 사용된다. 역사, 법, 판결문, 조약, 공문서, 계약서, 소설, 에세이, 비평, 편지, 일기, 작은 메모, 그리고 대화. 만약 내게 말하는 책이 있다면 일방적으로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소리를 청취하는 오디오 북이 아닌 앞서 거론한 말들의 형태 중 대화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말 하는 책은 항상 그 책을 듣는 누군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ps, <토킹 북>을 위한 배열, 2010, 카세트 테이프, 가변설치

지난 연재에서 밝혔듯이 소모뚜를 따라 버마행동의 한 행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 소리를 체취 했다. 하나는 대형 슈퍼 체인점에서 뒤섞여 흘러나오는 상품 바코드 찍는 소리와 그 상품을 계산대에 올려놓기 위해 상품 선전을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또 다른 하나는 단상 위에서 아웅산 수지 여사의 연설문을 대독하는 (유일)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 두 가지 소리는 화자인 그들에게 듣는 자로서 나의 위치에서 무엇으로 응답하게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구술사라는 방법론을 떠올렸다.

개인의 경험은 항상 사회의 변화와 궤를 맞추며 돌아간다. 그러나 정작 역사를 살아오고 구성했던 한 개인의 기억은 집단 안에서 거대 담론에 밀려 삭제되기 쉽다. 구술사는 개인의 경험을 말하게 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사회학 연구의 한 방법론이다. 이처럼 그간 잊혀져 왔던 개인의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은 역사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측면을 넘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각자의 삶을 반추하게 하게 한다. 이 지점이 듣는 자가 듣는 자로서 응답하는 무엇이 아닐까?


ps, <talking book: 가사, 노동>, 2010, 어머니, 여자, 여성의 손

애초에 이번 연재에서는 구술사라는 방법론을 빌려와 ‘구술사 다시 읽기’를 시도하려고 계획했다. 여성사 전시관에서 올 한해 기획주제로 선정한 ‘여성과 일’의 첫 전시 <서울로 간 순이 展> 리플렛을 보면 역사의 기록으로 등재되지 않아왔던 여자,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남편의 증권투자 실패로 가사도우미(파출부) 일을 하시게 된 분, 80년대 초부터 갑자기 사라졌던 버스 안내양이라는 직업군으로 일했던 분, 우리가 지금까지도 만날 수 있는 화장품 방문 판매사원(흔히들 ‘아모레 아줌마’라고 했다)이신 분, 이분들의 이야기가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실려져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 읽는, 대리하여 말하는 경험을 작업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날, 아웅산 수지여사 생일 행사에서 들었던 유일한 여성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녀는 말했다’를 전달하고 있었다. 나 자신의 말이 아닌, 타인의 말을 대신, 대리하여 읽는 것, 즉 말을 재현하는 경험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청자로서의 공유지점, 집단성, 나아가 공동체성을 형성한다.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교회당의 모습을 떠올려봐도 예배 혹은 미사 중 누군가 성경을 대리하여 읽는 순서가 반드시 마련되어있지 않은가. (종교 이야기는 긍정, 부정, 비판성 등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이야기 해야 할 맥락들을 형성할 것이므로 이 정도의 예로 그친다.)


ps, <talking book: 가사, 노동>, 2010, 동네슈퍼, 구멍가게, 아주머니, 어머니

가사, 노동이라는 주제의 구술사를 대신하여 말해줄 분을 찾다가 평소 서로의 작업 이야기를 교환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 혹시 주변에 이런 글을 읽어줄 분이 없는지 도움을 청했다. 내 요청에 그녀의 대답이 이러했다. “타인의 말을 대신 읽으려면 그 사람과의 시간이 많이 쌓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목소리의 진정성이 중요하잖아.”

맞는 말이다. 그녀의 지적에 나는 그녀의 평소 생활 반경에서 혹시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분이 없었는지를 물으며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음료수, 과자, 음식재료 등을 구입할 때 대형 슈퍼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부러 동네 구멍가게를 찾는다고 했다. 그렇게 가끔씩 들리는 구멍가게 중에 한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곳이 있단다. 그녀가 그 동네슈퍼(구멍가게)를 찾으면 아주머니께서는 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CNN과 같은 뉴스프로그램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계산할 때 ‘얼마에요.’ 라고 답할 뿐 거의 말을 하지 않으신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보자.

그래서 찾아간 목소리, 들었던 이야기가 그제 밤의 일이었다. 가게를 간혹 찾았던 친구가 그리 낯설지 않아서 그랬을까? 그녀(아주머니 혹은 어머니)는 우리를 친절로 환대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었고 그녀는 처녀시절 회사 경리, 결혼 후 요쿠르트 아줌마, 현재 동네슈퍼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그러나 더위에 틀어놓았던 선풍기가 그날 반가운 대화를 감싸고 있던 공기를 너무 심하게 울렸던 것인지, 녹음은 실패하고 말았다.

쓸 수 없는 사운드는 대화 뒤에 자리하는 어떤 실패감, 무력감, 배신감이 물리적으로 표현된 것인가? 사실 지난 리스닝 컴퍼니 프로젝트를 통해 타인을 무제한적으로 듣는 자세를 고수하면서도 ‘듣기’ 혹은 ‘대화’라는 윤리적이며 감성적인 의도 조차 내가 어떤 것을 요구하거나 누군가를 대상화시키는 지점은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불편했다. 이 생각이 다시 돌아온 유령처럼 귓가를 멍하게 때렸다.


ps, <talking book: 가사, 노동>, 2010, 그녀가 준 캔커피, 이야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손

이처럼 대리하거나 재현하는 주체로서 우리 혹은 내가 불러일으키는 실패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젯밤 우리의 기억 속에만 있게 된 그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녹음도 수월하게 되어 느닷없는 요청에 응하는 쑥스러움, 자신의 이야기가 타인에게 줄, 혹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 돌아올 영향을 걱정하던 그녀의 모습들을 들리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간간히 물건 사러 오는 손님으로 인해 쉬었다 계속했던 소리까지 녹음된 인터뷰를 별다른 편집 없이 간단히 붙이며 여름밤 더위에 그녀가 줬던 캔커피가 슬쩍 떠올랐다.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노이즈 가득한 쓸 수 없는 소리가 의미하는 정치성이 있다면, 듣기의 배신 뒤에 계속해서 담화의 의미가 자리한다면, 아마도 옆에 놓아둔 책(『말의 미학』, 도서출판 길, 2006) 속에서 미하일 바흐친이 말하는 바가 아닐까. “언어는 (그것을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발화를 통해 삶 속으로 들어가며, 삶 역시 구체적인 발화를 통해 언어 속으로 들어간다.”

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신 B동네 S슈퍼 그녀에게 감사를 드린다.


ps, <토킹 북>을 위한 배열, 2010, 카세트 테이프, 가변설치

ps_Talkingbook by soundatmedia
ps+이지아, <토킹 북: 가사, 노동>, 동네 구멍가게 그녀의 일 이야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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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아는 지역연구와 미술, 동아시아의 목소리(이상 대안공간 풀, 2007), 커뮤니티 커뮤니티(아르코미술관, 2008), 야간 상영회(309호, 인사동, 2009) 등의 워크숍과 전시에 참여했다. 이런 연구를 통해 지역들이 가지고 있는 이슈 혹은 정체성들을 성찰하며 그녀와 그녀의 세대를 읽어가는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현재, 오이도와 인천 센트럴 파크의 “진경^별류풍경”을 그리며 다시 그녀의 정체성을 정리하고자 한다.

Author
ps ps / 프로젝트 작가 콜렉티브

ps는 ‘추신’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는 여러 의미들을 지시하며, Traveling Magazine Table(인사미술공간, 2007)과 동아시아의 목소리(대안공간 풀, 2007)의 워크숍과 +82, 저널 볼 8008(인사미술공간), 커뮤니티, 커뮤니티(아르코미술관, 2008)의 출판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리스닝 컴퍼니’ 프로젝트(아르코미술관, 대안공간 풀, 2009)를 기점으로 타인을 향한/위한 자세, 발언 안에서 발생되는 운동성과 윤리성에 대해 질문해온 ps는 이제 협업자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모색하며 ‘비-규격-품 offstandard-work(풀, 2010)’ 등의 프로젝트에서 공통적인 것 안에 존재하나 드러나지 않는 개별성(특이성)에 관한 물음을 지속하려 한다. http://listeningcompany.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