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슈퍼 컴퓨터 시대의 라이브 공연

일렉트로닉 라이브 공연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말들이 있었다. 특히 우리처럼 노트북을 가지고 페스티벌과 클럽 무대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런 논의가 더욱 늘었다. 이런 유형의 공연을 지칭하기 위해 ‘랩탑 퍼포먼스(laptop performance)’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아마 이런 공연을 접하기는 했으나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 매던 저널리스트들이 그럴싸하게 갖다붙인 말일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노트북은 또 하나의 악기일 뿐이다. 내가 무대에서 노트북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덩치 큰 음향 장비를 대체할 수 있는 이동식 슈퍼 컴퓨터이기 때문이다.

노트북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러니를 추구할 작정이 아니라면, <델을 위한 교향곡>, <여섯 대의 바이오 노트북을 위한 조곡>, <파워 PC를 위한 두 번의 충돌> 같은 노래를 작곡하고 연주할 사람은 없다. 노트북을 악기로 만드는 것은 거기 깔린 소프트웨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청중은 음악을 들으면서 노트북을 본다. 하지만 청중 입장에서는, 진짜로 음악을 만드는 것이 무엇이고 공연자가 이 도구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엄밀히 말해 노트북 그 자체는 악기가 아니며, 악기(=소프트웨어)는 그 안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 악기라는 것이 대개는 하나 이상이고, 공연자가 그것을 ‘연주’한다고 말하기도 사실 좀 어렵다. 청중을 위해 실제 상황을 비교적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대형 밴드가 노트북 안에 숨어서 엄청나게 많은 악기들을 연주한다고 해야 할까. 유일하게 눈에 보이는 부분은 노트북 앞에 선 공연자인데, 고집센 전문 연주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분연히 교향곡을 이루어 내는 지휘자의 격렬한 물리적 움직임에 비하면 그의 액션은 거의 지루할 지경이다. 노트북 상에서는 피아니시모와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의 차이가 1픽셀, 즉 0.03mm까지 줄어들 수 있다.

청중이 공연용 소프트웨어에 관해 거의 모른다는 사실은 노트북 라이브 공연이라는 기적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이기도 하다. 음악 공연 소프트웨어는 음악 제작 소프트웨어와 다르다. 설령 같은 소프트웨어를 쓴다고 해도 작곡의 프로세스와 공연의 프로세스가 같을 수는 없다. 무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깨작거리는 사람들이 도대체 뭘 하는지 이해하려면, 일렉트로닉 음악의 역사와 컴퓨터 기술의 세계로 좀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이는 결국 일렉트로닉 라이브 공연의 정확한 개념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제1장 – 보이지 않는 악기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음악을 만든다고 대답하는데, 그러면 꼭 무슨 악기를 연주하냐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러면 나는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리듯이 ‘컴퓨터’라고 대답하면서, 이걸 설명하려면 최소한 삼십 분은 걸리겠구나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쉰다. (요즘에는 ‘에이블턴(Ableton)’이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면서 그냥 프로그래머라고 답하는 편이다. 그러면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어떻게 컴퓨터를 연주하는가? 리듬에 맞추어 LCD 스크린을 때리면 되나? 활로 켜나? 해머로 두드리나? (그럴 때도 있고!) 결국 컴퓨터를 연주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이 ‘악기’가 일반적인 악기의 범주에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고전적인 음악의 경우, 악기는 대개 비(非)전자적이며 사용자와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통해 소리를 낸다. 악기는 특유의 물리적 속성이 있어서 그에 따라 특유의 음색과 연주 방식이 정해진다. 음악은 악기의 속성과 연주자의 테크닉이 조합된 결과다. 아주 작은 악기는 아주 큰 악기는 소리가 많이 다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두 합심해서 연주하면 지극히 거대하고 복잡한 소리가 난다. 어떤 물체의 표면으로 다른 물체의 표면을 두드리면 북 소리 같은 진동이 발생하는데 그 음색은 재질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바로 이런 보편적 경험과 지식 덕분에, 이를테면 무성영화 스타일의 농담이 웃겨 보이는 것이다.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때렸는데 ‘띠용용용’하는 소리가 나면 웃음이 터진다.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누가 컴퓨터에서 스페이스바를 누르는데 브루스 스프링스턴(Bruce Springsteen) 같은 소리가 나길래 자기도 같은 키를 눌렀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난다고 당혹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뭐라고 설명할 것인가? 보통 ‘진짜’ 악기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만 정확도, 속도, 음량, 역동성, 풍부함, 음색 등을 조절할 수 있으며, 적절한 교육과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돼야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죽은 듯이 고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악기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런 악기는 일렉트로닉 악기와 어딘가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파이프 오르간은 건반에 압력을 가해서 누르기만 하면 별도의 조작 없이도 일정한 소리가 난다. 오르골은 회전식 금속 실린더에 돌기 모양으로 악보가 새겨져 있어서 스위치만 켜면 몇 번이고 같은 노래를 재생한다. 그런데 파이프 오르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악기와 상당히 달라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과 소리를 발생시키는 오르간 파이프는 직접 접촉해서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만약에 기계식 에어 밸브를 전자식으로 바꾸고,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사람을 악보가 기입된 천공카드로 대체하면, 파이프 오르간은 예전과 똑같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동일한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자동 피아노, 1920년

위의 이미지는 마샬 앤드 웬델(Marshall & Wendell)에서 1920년대에 제작한 앰피코-플레이어 피아노(Ampico-Player Piano)이다. 이 장치는 작곡가 콘론 낸캐로우(Conlon Nancarrow)가 인간이 연주할 수 없는 곡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자동 연주’ 장치는 전기가 도입되면서 더욱 복잡하게 발전했고, 전자기학과 컴퓨터 기술이 혁신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음색도 풍부해졌으며, 그러면서 일렉트로닉 작곡가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일렉트로닉 악기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고전 음악 연주자를 위한 것으로 대개 기계식 키보드가 지원되고, 다른 하나는 작곡가를 위한 것으로 사운드 녹음, 편집, 조작 기능이 지원된다. 모든 일렉트로닉 악기는 이러한 양 극단 사이에 놓인다.

연주자 대신에 악보 데이터로 직접 통제되는 음향 생성기를 사용하면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에 휘말리지 않고 더욱 정교하게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각종 컴퓨터 음악과 현재 유행하는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은 대부분 실시간 악기 연주와 전혀 무관하게 제작된다. 작곡가는 지휘자, 관리자, 시스템 오퍼레이터로서 전체 타임라인의 어느 지점에 어떤 요소가 놓여야 하는지 결정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기존의 음악 연주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실시간 프로세스가 아니며, 오히려 건축, 회화, 조각, 공학에 더 가깝다.

이처럼 일렉트로닉 음악은 비(非)실시간 프로세스로 제작되기 때문에 곡의 구성 요소를 제각기 고치고 또 고쳐서 끝없이 복잡하고 상세한 음악을 구현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음악을 만들 때도 ‘조작 취소(undo)’나 ‘새 이름으로 저장(versioning)’을 적용할 수 있다. 컴퓨터는 이런 조작에 최적화된 도구다. 같은 작품을 무수히 많은 버전으로 저장할 수도 있고 극단적으로 정확한 디테일을 추구할 수도 있다. 복잡한 클래식 스튜디오 셋업에 비하면 작업의 흐름도 훨씬 효율적으로 개선되었다. 이제 더 이상 거대한 믹싱 데스크, 각종 하드웨어 유닛과 물리적 악기 사이로 열 명 남짓한 조수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상황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적절한 소프트웨어로 몇 주 동안 작업하는 것만으로 200명의 연주자, 다섯 꾸러미의 각종 이펙트 유닛, 엄청난 규모의 악기 세팅과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멋지지 않은가? 적어도 여기까지는. 하지만 다음 단계로 가보자.

제2장 – 테이프 콘서트

컴퓨터 음악의 초창기에는 공연을 하려면 테이프를 재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소위 ‘테이프 콘서트(tape concert)’의 시작이었다. 일반 청중은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끝나는 ‘콘서트’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 세기가 지난 현재 우리 모두는 ‘노트북 콘서트’에 대해 비슷한 경험이 있다. 복잡한 일렉트로닉 곡은 대부분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생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최신 컴퓨터를 쓰면 모든 음향 레이어를 실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공연자가 그 모든 프로세스를 실시간으로 통제해서 들을 만한 음악을 뽑아낼 수 있겠는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를 다 가지고 있고 심지어 그 악기들을 모두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혼자서 오케스트라 전체를 동시에 연주해서 교향곡을 짜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앰펙스(Ampex) 테이프 레코더

20세기 중반의 컴퓨터 음악가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컴퓨터 음악은 비(非)실시간 프로세스로 구현되므로, 그 결과를 청중에게 전달하려면 테이프 콘서트밖에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데이터를 연산해서 사운드를 생성하는 데 드는 시간이 완성된 사운드의 재생 시간보다 훨씬 길 때도 많았다. 실제로, 십여 년 전만 해도 웬만큼 복잡한 소리를 설계하거나 수정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많이 든다고 여겼다. 이는 노트북 ‘솔로’ 라이브 공연이 극히 최근에야 논의의 대상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1930년대에도 테레민(Theremin)이나 오스카르 잘라(Oskar Sala)의 믹스투어 트라우토니움(Mixtur Trautonium) 같은 실시간 일렉트로닉 악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한 명의 연주자를 위한 악기로, 표현이나 접근법 측면에서 기존의 어쿠스틱 악기와 흡사했다. 그것은 노트북처럼 오케스트라 전체를 대체할 수 있는 복잡한 기계가 아니었다. 노트북 공연의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최초의 일렉트로닉 악기보다는 테이프 콘서트의 상황이 훨씬 유사점이 많고 따라서 더 시사적이다.


트라우토니움(Trautonium), 1935년

당시 청중은 이런 공연을 ‘테이프’ 콘서트라고 부르면서도 테이프가 아니라 스피커를 ‘악기’로 여겼다. 스피커는 믹싱 데스크와 테이프 머신을 만지는 오퍼레이터보다 훨씬 돋보였다. 스피커는 무대 한가운데 있었지만 오퍼레이터는 객석이나 무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적 차원에서 이 인물은 분명 음악가가 아니라 그냥 오퍼레이터처럼 보였는데, 이러한 배치는 부득이한 실용적 이유가 있었다. 오퍼레이터는 지휘자로서 공연 전체의 사운드를 통제해야 하므로 되도록 청중과 가까운 위치에서 사운드를 체크하는 편이 유리했던 것이다. 여러 대의 스피커가 공연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요인은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다.

다중 스피커 테이프 콘서트는 오퍼레이터가 표현력을 발휘할 여지를 제공했다. 객석 주변에 여러 종류의 스피커를 배치해서 스테레오 레코딩을 공간적으로 분배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공연 전반을 결정했다. 이제 오퍼레이터는 유능한 디제이처럼 매체에 저장된 곡을 적절히 조작해서 주어진 공간으로 전달했다. 다만 디제이가 여러 음원을 믹싱해서 스테레오 사운드를 구성한다면, 테이프 콘서트의 지휘자는 매 순간 최상의 효과가 발생하도록 스테레오 시그널을 여러 대의 스피커로 분배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것은 엄청난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었지만, 오퍼레이터는 여전히 객석 한가운데서 폭풍의 눈처럼 침묵을 지켰다.


프랑수아 베일(Francois Bayle)이 1974년 발명한 멀티 스피커 시스템 ‘어쿠스모늄(acousmonium)’으로 공연하는 모습

디제이의 개념은 미리 녹음된 곡을 새로운 맥락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테이프 오퍼레이터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이들의 차이라면, 한쪽이 소리를 공간 상에 ‘분배’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여러 음악을 하나로 ‘조합’한다는 것뿐이다. 녹음된 합창곡을 들으면서 바로 그 합창의 순간을 지금 경험하고 있다고—검은 색 음반 속에서 작은 가수들이 바로 지금 노래하고 있다고—여기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합창단 그 자체를 평가할 때와는 다른 기준에 따라 디제이의 능력을 평가한다. 좋은 디제이는 청중이 일반적으로 좋은 공연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킨다. 우리는 공연의 프로세스를 이해할 수 있고, 디제이의 테크닉이 얼마나 뛰어난지 판단할 수 있고, 디제이의 특정한 액션이 사운드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대략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턴테이블과 믹서라는 ‘악기’ 연주를 평가할 줄 안다. 그렇다면, 미리 녹음된 음악을 다중 스피커로 분배하는 작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중 스피커 콘서트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음악 그 자체와는 별도의 차원에서) 공연 그 자체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

고전적인 테이프 콘서트에서는 대개 청중에게 공연작품의 창작 과정과 작가의 의도를 소개하는 장문의 소개글이 낭독되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 일렉트로닉 음악을 무대에 올릴 때도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테이프 콘서트가 학계에서 널리 수용되고 이해된 데 반해서, 학계 바깥의 일렉트로닉 음악은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 어떤지는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레코드 회사의 압박 때문에, 자신의 거대한 에고에 못 이겨서, 혹은 그저 방세가 밀려서, 불쌍한 프로듀서는 애초에 ‘공연’이라고 할 수 없는, 처음 작곡할 때부터 ‘연주’된 적이 없는 음악을 무대 위에 올리게 된다.

그렇게 일정 부분 미리 녹음해둔 라이브용 사운드를 노트북으로 재생하는 공연을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녹음해둔 노래와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적으로 만든 노래 (최신 노트북을 쓰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물론 아주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곡을 즉석에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을지 생각해볼까? 그런데 도대체 무대 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반짝이는 애플 로고 너머로 뭔가 끼적거리고 있는 공연자의 모습뿐이다. 설령 공연에 사용되는 장비를 잘 안다고 해도 객석에서 무대 위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런 상황은 청중뿐만 아니라 공연을 진행하는 작곡가에게도 별로 유쾌하지 않다. 일단 청중은 공연의 질을 평가하지 못하고 음악이나 비주얼의 질만 따지게 되지만, 그나마 공연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다. 청중은 위태로운 즉흥 공연과 완벽하게 완성된 곡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을지 생각해 보지만, 애초에 지금 나오는 사운드가 어디까지 녹음된 것이고 어디까지 라이브인지 판별하지 못한다. 한편 공연자는 좀 더 유연하고 상호 작용적인 공연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어쨌든 15×5m 크기의 대형 무대에서 달랑 노트북 한 대만 가지고 뭔가 대단한 쇼를 기대하는 청중과 대면하기는 아무래도 볼썽사나울 것이다.

고전적인 테이프 콘서트는 미리 녹음된 곡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데 적합한 공연 형식이다. 청중은 공연 시작 전에 공연작품과 공연 형식에 대해 충분한 고지를 받으며, 오퍼레이터는 객석 한가운데 혹은 객석 근처에서 스피커를 마주보고 작업한다. 이는 통상적인 댄스 클럽 혹은 로큰롤 스타일 ‘라이브’ 공연과 전혀 다른 맥락이며, 따라서 현재 일렉트로닉 음악 공연에 곧이 곧대로 차용할 수 없다. 결국 문제는 이렇다. 진짜로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상호 작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대 위에서 내가 뭘 하는지 청중에게 알려주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공연 시작 전에 10분짜리 장문의 안내문을 낭송하는 건 빼고 말이다.

제3장 – 하드웨어의 황금 시대

역사적으로, 학계의 컴퓨터 음악 창작은 일렉트로닉 악기 및 인터페이스 디자인 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런 음악 공연을 찾는 관객은 대개 실험적인 장치를 사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고, 결과가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새로운 시도 자체를 좋게 평가한다. 나는 몇 년 전에 한 교회에서 개최된 컴퓨터 음악 컨퍼런스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무대 위에 실리콘 그래픽스 워크스테이션 배터리와 제조사를 알 수 없는 각종 전자기기가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거기 설치된 장비 총액은 교회 건물의 부동산 시가보다 훨씬 비쌌을 것이다.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지자, 공연자 다섯 명이 스크린을 마주하고 각자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요해진 객석은 기대감으로 충만했다. 공연자들이 격렬하게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간혹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한 공연자가 왼손을 높이 들었는데, 그 손은 데이터 장갑(data glove)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장치로 중무장되어 있었다. 그가 손을 움직였고, 1초 정도 후에 무언가 귀를 찌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신경질적인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디지털로 변환해서 길게 잡아 늘인 것 같은 소리로, 부드럽게 감싸는 잔향 같은 것도 없이 아주 쌩쌩했다. 공연자들은 각자 스크린만 노려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하이테크 장갑을 쓴 남자는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고, 그때마다 므으으으이이이오오오오오우우우쓰스으으 하는 기괴한 고양이 소리가 꼬박꼬박 1초 늦게 뒤따랐다.

미이이이오오우우우이이이이오오오오오…… 이우이우이우이이이이이이……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이 소리가 이상하거나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고, 나 혼자 웃음을 참느라 잔뜩 애를 먹었다. 심지어 그때 나는 술이나 약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데이터 장갑은 주류 음악계로 진입하지 못했지만, 무대 위의 공연자가 무언가 극적인 액션을 취해서 납득할 만한 음악적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잠재력을 확실히 증명했다.

처음에 학계의 컴퓨터 음악 창작은 실시간 공연보다 비(非)실시간 프로세스에 매진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키보드 달린 신디사이저가 상용화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것은 엔지니어가 조작하는 기계가 아니라 음악가가 연주하는 악기로 설계되었다. 진짜 음악가들이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그(Moog), 오버하임(Oberheim), 야마하(Yamaha), 롤랜드(Roland) 등 온갖 현란한 키보드가 무대 위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전자적으로 생성한 소리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도 점점 높아졌다. 이러한 추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이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 같은 일렉트로닉 포스트-록 밴드가 등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의 라이브, 런던, 1982년

청중은 위압적인 기계장치, 반짝이는 조명, 거대한 믹싱 콘솔, 녹색으로 희미하게 발광하는 컴퓨터 단말기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야말로 미래의 쇼케이스였다. 어떻게 그런 기계에서 생전 처음 듣는 새로운 소리가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대 위에는 기계 장치가 잔뜩 있었고 공연자들은 복잡한 액션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모듈러 신디사이저에 케이블을 연결했다가 다시 연결을 끊어야 할 때도 있었고, 음량 조절기를 움직여야 할 때도 있었고, 커다란 플로피 디스크를 주의깊게 기계 장치에 삽입할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플로피 디스크는 고사하고 무대 위에 설치된 대부분의 기계를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멜로디는 직접 손으로 연주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하이테크의 마법으로 충만한 이벤트였고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콘서트는 일렉트로닉 음악 창작을 라이브로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였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진짜 ‘라이브’이기도 했다. 무대는 청중 앞에 공개된 일렉트로닉 스튜디오였고, 공연자들은 거기서 실시간으로 기계를 만져서 사운드를 빚어냈다. 그것은 거대한 정념이 들끓는 엄청난 드라마였고, 때때로 정말 대단한 음악적 결과를 도출했다.

층층이 쌓인 거대한 키보드와 이펙트는 멋진 무대 장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창작하고 녹음할 때 쓰는 실용적 장비였다. 그 기계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것은 일렉트로닉 음악을 공연하는 가장 명쾌하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끔찍하게 비싼 기계였으므로, 운송과 재설치에 따르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장비를 구입할 능력이 있다면, 아마 앨범을 팔아서 운송비 정도는 충분히 댈 수 있을 거고, 그걸로 무대 공연에 청중을 끌어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일렉트로닉 음악은 ‘대중을 위한 음악’이라는 록 음악의 고전적인 시나리오를 고스란히 따라갔다. 그것은 일렉트로닉 슈퍼 그룹이 엄청나게 비싼 하드웨어로 세상을 풍미했던 황금 시대였다. 옛날 옛적의 이야기다. 1980년대 후반에 저렴한 컴퓨터 기술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가정용 컴퓨터 기반의 미디 시퀀싱이 등장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일렉트로닉 음악을 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는 창작뿐만 아니라 공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4장 – 명성의 팽창과 장비의 축소

침실에서도 일렉트로닉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이 침실을 (침대만 빼고) 무대 위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꺼낸 단촐한 장비를 낡은 창고 지하실의 임시 공연장이나 댄스 플로어로 옮겨서,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되도록 바에서 가까운 곳이 좋다) 점유하고 공연을 시작하는 것이다. 80년대의 대규모 무대 공연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90년대 초반의 테크노 프로듀서는 높은 무대를 가설하지 않고 청중들 틈에서 저자세를 취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장비는 작아졌고 공연자와 청중의 거리도 줄어들었다. 당시 베를린의 한 클럽에서, 나는 공연자들이 롤랜드(Roland) TR-808 드럼 컴퓨터를 조작하다가 믹서에서 몇 가지 패턴의 소리를 낮추었다가 다시 아타리 컴퓨터의 시퀀서를 조작하는 모습을 한참 지켜본 적이 있다. 음악은 거칠고 단순해서 공연자의 액션과 사운드의 상관 관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믹서에 불이 깜빡거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다른 동료와 눈을 맞추다가, 일시에 빵 터뜨리는 바로 그 순간, 그 황홀한 느낌! 그것은 저렴하고 간단한 장비로 청중 한가운데서 시연할 수 있는 일종의 마법과도 같았다. 모호하고 신비롭지만 전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고, 모든 면에서 직접적이며, 무엇보다도, 진짜 라이브였으니까! 예이!

하지만 역사의 비극이랄까, 그렇게 멋진 시간을 가능케 했던 힘이 결국은 그 시간을 끝장내고 말았다. 컴퓨터가 갈수록 저렴하고 강력해지면서, 더욱 다양하고 복잡한 기능들이 작은 상자 속으로 수렴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 때문에 일렉트로닉 라이브 공연은 또 다시 크게 변화했다. 침실 스튜디오의 컴퓨터 기능이 향상되면서 점점 더 복잡한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완성된 곡을 라이브로 재창조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예전에 롤랜드 TR-808, 몇 가지 이펙트와 신스 워시(synth wash)로 만든 스트레이트 테크노는 몇 시간이나 끝없이 변주하면서 공연할 수 있었다. 반면 90년대 중반의 드럼-앤드-베이스(drum&bass)는 정해진 시간 내에서 교묘한 샘플링과 정교하게 삽입한 변환점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어서 라이브 공연이 어려웠다. 그렇게 진짜 라이브 공연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이제는 곡이 너무 복잡해져서 대부분의 파트를 미리 녹음해놓든가 아니면 여러 명의 공연자들이 복잡한 오퍼레이션을 실수 없이 분담하지 않으면 라이브가 불가능했다. 결국 대다수 라이브 공연은 테이프 콘서트 비슷한 것으로 되돌아갔다. 모든 곡이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재생되었고 공연자는 컴퓨터가 작동하는 동안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나마 공연 형식이 이를 반영해서 변화했다면 좋았으련만, 공연 문화는 정체했다. 이제 공연자는 무대 위에서 무언가 대단한 조작을 하는 척 연기하거나 아니면 거의 완성된 음악을 틀어놓고 간단한 조작만 하는 데 만족한다. 그는 기계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음악 작업과도 멀어지고 관객과도 멀어진다. 이러한 변화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으니, 바로 ‘명성’이다. 그것은 기술 다음으로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다. 명성은 공연자를 무대 위에 세우고 관객으로부터 분리하며, 기술은 장비를 소형화해서 오케스트라 전체를 노트북 하나로 압축시킨다. 명성이 커지고 장비가 작아지는 것은 공연의 생명력을 끊어놓는 강력한 독약이다.

내가 처음 청중 앞에서 일렉트로닉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는 대부분 비(非)상업적인 상황이었고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포스터에 박힌 슈퍼 스타의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음악을 즐기려고 공연장에 왔다. 청취자와 가까이 서서 공연을 하고 있으면 모두와 하나가 된 듯한 고양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친밀한 분위기는 공연자와 청중의 상호 작용을 촉진했다. 우리는 함께할 수 있었고, 혹은 적어도 함께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 조금 유명해지고 나면 그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출발해서 몇 년 사이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는 이제 더 이상 바 옆의 작은 테이블에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대형 무대에 오른다. 청중이 원하는 것은 옆집 청년이 아니라 아이돌이 제공하는 압도적인 경험이다. 청중은 레코드를 들을 때와 똑같은 충실한 청취의 경험을 기대하고 공연장에 온다. 하지만 그것은 실시간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슈퍼 스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청중과 멀리 떨어진 저기 높은 자리에 홀로 외롭게 서서 노트북으로 미리 녹음해 둔 음악을 튼다. 청중에게 일렉트로닉 라이브 음악의 위대한 세계를 제공하는 대신에, 우발적인 상호 작용에 몸을 내맡기는 대신에, 슈퍼 스타는 타임라인 아래 음악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이펙트를 써서 좀더 나은 결과를 뽑으려고 애쓸 뿐이다.

청중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저 자는 무대 위에서 이메일을 체크하는 건가, 아니면 비행 시간을 확인하는 건가? 물론 공연자도 이 상황이 즐겁지는 않다. 공간적으로 울려퍼지는 음향적 피드백 없이 순전히 모니터에만 의존해서 일렉트로닉 음악을 공연하는 것만큼 힘들고 지루한 일은 없다. 객석에 울려퍼지는 바로 그 소리가 무대 위에서도 들린다면 훨씬 좋은 소리를 뽑아낼 수 있을테지만……. 최악의 상황은 고전적인 록 밴드 세팅 안에 들어갈 때다. 두 개의 탑처럼 거대한 스피커 사이에서 저질 플로어 모니터만 믿고 공연을 해야 하는데,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연기 때문에 시야는 흐리고 당신은 노트북 뒤에 초라하게 서 있다. 대개 청중은 지금 당신이 뭘 할 건지, 어떻게 원하는 소리를 뽑아낼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같이 무대에 선 밴드 동료들과 교감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결국 당신과 당신 노트북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 최상의 해법은 가능한 크고 단순하게 연주해서 청중과 무언가 화학 작용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게 전부다.

불행히도 학계의 조그만 컴퓨터 음악 커뮤니티를 벗어나면 일반 공연장에서는 객석 한가운데서 연주할 기회를 얻기 힘들다. 애초에 클럽에서는 시도조차 해볼 수 없다. 당신도 새벽 4시에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 작은 탁자를 놓고 노트북을 쓰는 상황은 원치 않을 것이다. 혹시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돼서 음향 엔지니어와 몇 시간이나 말싸움을 벌인 끝에 객석에서 공연할 수 있는 상황을 쟁취했다고 해도, ‘팬들의 기대치’라는 또 다른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 당신의 팬들은 저기 높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당신을 올려다 보고 싶어한다. 그들은 ‘괴상한 실험적 셋업’ 대신에 익숙한 쇼를 즐기길 원한다.

컴퓨터 음악을 소개하는 것과 라이브로 공연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객석 한가운데 서 있는 테이프 오퍼레이터는 최상의 사운드를 창출해서 완성된 작품을 가장 탁월하게 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 하에 있다. (그는 단순히 공간의 음향학적 조건에 맞추어 세팅을 조절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믹싱 데스크 테크닉을 동원해서 역동적으로 사운드를 통제하기도 한다) 반면 라이브 공연은 완벽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 무언가 생동감 넘치는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니 거칠고 직설적인 라이브 무대는 신나고 재미있지만, 복잡한 스튜디오 작업을 무대 위에서 재창조하려고 하면 대개 실패하기 마련이다.

거친 사운드는 공연의 시각적 모습, 즉 누군가 무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모습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가 대체 뭘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해도, 한 사람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작업의 복잡성이 대략 어느 정도일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어떤 액션이 울부짖는 리드 기타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면, 우리는 그 공연이 라이브라고 느낄 것이다. 반면에 너무 완벽하고 디테일한 사운드가 계속된다면, 녹음된 것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대부분 그 의심은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면 결론을 짓자. 단순하고 거칠며 직설적인 공연이 진짜 공연이다. 복잡성과 디테일은 잊어라. 다음에 우리가 공연에 초대된다면, 드럼 컴퓨터, 싸구려 키보드, 마이크만 들고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틀림없이 취해 있으리라는 사실도 잊지 말도록. 아마 약효가 좋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음악적으로 원하는 게 이런 것이 아니라면 어쩌지? 그러면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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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onolake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된 ‘Live Performance in The Age of Super Computing’(2007)을 저자의 승인하에 번역하여 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원문은 http://www.monolake.de/interviews/supercomputing.html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속편인 ‘Live Performance In The Age Of Super Computing II’(2009) 의 원문은 http://www.monolake.de/interviews/hitchhiker.html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번역자 소개: 윤원화
번역자. 필자. 주로 글을 만지는 일을 한다. 역서로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공역), <컨트롤 레벌루션>, <청각적 과거>(출간 예정) 등이 있다.

Author
Robert Henke (aka Monolake) Robert Henke (aka Monolake) / 사운드 디자이너, 소프트웨어 개발자, 설치 예술가

Gerhard Behles와 함께 1995년부터 Monolake라는 이름으로 컴퓨터음악을 발표해오고 있다. 그의 음악은 클럽문화뿐 아니라 아카데믹 사운드 리서치를 기반으로한다. 또한 다수의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들을 페스티벌 및 예술공간에서 전시해오고 있다. 음악 소프트웨어인 Ableton Live의 개발자이며 베를린예술대학에서 사운드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3 Responses
  1. punkt punkt says:

    오랜만에 정독해서 읽은 글입니다.
    로버트 헨케, 호방한 직설화법이 멋있군요.
    번역해주신분께 감사드립니다.

  2. 라이브공연과 테이프콘서트의 장단점을 잘 정리한 것 같습니다. 멋지군요

  3. Sound@Media Sound@Media says:

    말씀 감사합니다. 글도 좋고, 번역도 잘 되었죠 ^^ 웹진의 번역을 맡아주고계신 윤원화님의 번역서< 청취의 과거>(원제: The Audible Past)도 얼마전 현실문화연구에서 발간되었습니다. http://bit.ly/atTdj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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