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음향전(sonic warfare)이란 무엇인가?

21세기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이래, 지구는 그 불안의 주파수에 공명하여 진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 폭발음의 잔향 속에서, 익명의 P2P 파일 공유 네트워크를 설계하여 전 지구적 음악 산업에 일대 변동을 초래한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들은 연쇄적 테러 행위의 네트워크에 “예언자”로 징집되었다. 아랍 미디어 네트워크의 책상 위에서는 지하드 성명서를 중계하는 오디오 및 비디오 카세트가 부정기적으로 발견된다. 희귀한 테러의 단서를 발견한 서방 안보부는 이 음향 데이터를 법적 음향 분석실에 조회한다. 이는 지문 분석과 유사한 것으로, 녹음된 음성에서 음운간 이행 지점을 추적했을 때 단락이 발생하는 패턴이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응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유의미한 정보든 아니든 간에, 이 맥동하는 음향적 신호는 두려움의 생태계에서 무형의 실재적 변동을 촉발한다.

이는 모두 최근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음향적 차원은 오래 전부터 전투의 일부를 구성했다. 2차대전 당시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감정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확성기를 썼던 것부터 빈 라덴이 오디오로 메시지를 녹음했던 것까지, 음향전의 테크닉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그럼에도 당대의 비대칭적 전투에서 나타나는 실체 없고 탈중심화된 네트워크가 음향 문화의 탈중심화된 네트워크 내에서 어떻게 공명하는지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의 기분과 감각적 경험, 정보를 둘러싼 전투의 현장에서, 몸, 기술, 음향적 진동, 그 모든 것이 리드미컬하게 공명하는 음향 시스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치되는가? 또한 그것은 어떤 비무장지대를, 이를테면 춤과 폭력 간의 불확실하고 가상적인 경계를 점유하여 감정을 조작하고 공포를 퇴치하기 위한 연구소들을 산출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음향전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떤 본질을 갖는지 묻는 것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잠재성이 있는지 묻는 것이 좀더 실용적이다. 그렇다면 먼저, ‘음향전’이라는 말이 어떤 효력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그것은 정치의 미시음향과 음향의 미시정치를 개념적으로 재접속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문화적 긴장을 증폭하는가? 이 글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응답하는 미완성의 스케치로서, 개념, 문화, 기술의 서로 다른 수준에서 당대 문화의 불연속선들을 가로지르며 배치되는 음향 시스템의 불연속체를 식별하고자 한다. 새천년의 여명기이자 사이버네틱 전쟁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음향전 연구는 21세기에 새로이 출현하는 문화적 분쟁, 집단성, 지각(perception)의 양식에 대해 몇 가지 흥미로운 패턴을 드러낸다.

비록 별다르게 눈에 띄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청각계(audiosphere)는 역사상 거의 언제나 군사화의 요구에 복속되었다. 근대 실험음악의 심장부에는 음향전의 개념이 있었다. 단적인 예로, 음향적 아방가르드의 절정이었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의 미래파적 신음악 선언 <소음예술(The Art of Noises)>을 보라. 루솔로는 폭발, 라이플 총의 발사, 산업적 기계의 소음이 고전 음악과 부르주아 미학에 찌든 인간의 감각중추를 공격한다고 찬양했다. 미래파적인 ‘소음예술의 전쟁기술(art of war in the art of noise)’은 음악계의 문화적 혁신을 감각적 전쟁으로, 다시 말해서 신경계의 위계적 계층화와 분배를 둘러싼 투쟁으로 규정했다. 20세기 초의 호전적인 욕망의 장이 결정화된 것으로서, 미래파는 전장에서 분열되고 신경증에 걸린 정신을 가공하여 새로운 종합에 도달하고자 했다. 미래파는 과거의 유기적 전체성과 결별하고 기술적 향상을—또한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의 관점에서는 남근적 연장(phallic extension)을—받아들여 신체와 음향적 감각을 새로이 재접속하자고 주장했다.

자크 아탈리(Jaacques Attali)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같은 이론가들은 20세기 초반 미래파의 개념적 실험, 이를테면 루솔로나 마리네티가 주창했던 전투 신경증의 시학으로 거듭 되돌아가서 전쟁 기계와 미디어 기계의 교차점을 탐구한다. 미래파는 소음, 전쟁, 속도의 개념을 산업 시대의 기술감각(technosensation)과 혼성하여 그들 생각에 조화로운 질서에 대한 공격이 될 법한 무언가를 발진시켰다. 루솔로는 1913년 선언문에서 음악적 소리가 “음색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나 제한되었다고 지적한다. “아무리 복잡한 오케스트라라도 결국 현악기, 관악기, 목관악기, 타악기 등 네다섯 가지 음색의 악기군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근대 음악은 이 협소한 소리만 가지고 애써 새로운 음색의 다양성을 창조하려 버둥거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우리는 이러한 소리의 제한을 풀고 소음-소리의 무제한적 다양성을 정복해야 한다.”

루솔로와 마리네티는 모두 전장을 찬양했다. 그것은 시각이 감각의 피라미드에서 내려와서 감각적 항행을 촉각적 영역에 넘겨주는 탄도학적, 공기역학적 공간으로 여겨졌다. 루솔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기계화, 금속화된 근대전에서 시각적 요소는 거의 전무하다. 반면 소음의 감각, 그 표현성과 중요성은 무제한적이다. […] 소화탄과 유산탄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아직 폭발하기 전이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 구경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소음만 듣고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진군하는 순찰대의 존재를 식별할 수 있으며, 심지어 순찰대가 몇 사람 정도인지도 가늠할 수 있다. 라이플 발포음이 얼마나 센지 들어보면 해당 위치에서 방어군이 몇 명인지도 알 수 있다. 소음을 통해 사실상 모든 움직임과 활동을 알아챌 수 있다.”

이탈리아 미래파 이후, 음향 기계와 전쟁 기계의 교차점은 문화 분석의 장으로서 언제나 ‘소음’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해 지배되었다. 소위 ‘소음,’ ‘잡음,’ 또는 ‘조직되지 않은 소리’는 청각사회적 문제의 어떤 위계적 계층 하에서 안주하는 보수적 성향에 분노를 표하는 여러 실행가-이론가들의 무기이자 일종의 ‘코드 폭탄(code bomb)’으로 여겨진다. 루솔로에서 아탈리에 이르기까지, 소음은 본래적으로 급진적인 것, 음악 바깥에서 음악을 위협하고 음악에 새롭게 젊음을 부여하며 무언가 유례없는 일을 벌일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탈리는 미래파를 따라 소음을 문화적 무기로 이해한다. 그것은 미학과 경제학의 청각사회적 전쟁에서 음악적 코드와 네트워크를 공격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아탈리에 따르면, 정보 이론에 포섭되기 전까지 “잡음은 언제나 파괴, 무질서, 더러움, 오염으로, 코드에 의해 구조화된 메시지를 위협하는 것으로 경험되었다. 그것은 모든 문화에서 무기, 신성모독, 전염병의 관념과 연관되었다.”

미래파에서 20세기 초반까지, 근대주의적인 음향적 아방가르드는 모두 소음에 몰두했다. 소음과 그 개념적 짝패 ‘혼돈’은 앞서 살펴본 “소음예술”뿐만 아니라 존 케이지의 소리와 우연과 주역에 대한 실험, 프리재즈, 일본의 소음 테러리즘, 더 나아가 최근의 디지털 불량 데이터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적 관심, 프로세스의 미학, 그 연장선 상에서 생성적 알고리즘 음악과 마이크로사운드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소음이라는 무기를 동원해서 신체(와 그 감각, 반응, 습관적 발작)를 둘러싼 지각(perception)의 전쟁에 뛰어든다는 정형화된 아방가르드적 시도는 그 급진적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매번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실패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가 지적하듯이, 이런 실험은 대부분 “블랙홀이 형성되려다 만 공명통을 남겨놓을 뿐이다.” 이미 20세기 초반의 급진적으로 분열증적인 사운드스케이프에서, 루이즈 바레즈(Louise Varese)는 이탈리아 미래파의 소음 전술이 “떠들썩한 일상 속에서 이미 진부해지고 지루해진 것을 맹목적으로 복제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 분열증이 편재하는 21세기에 이르러, 소음이 ‘장르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이미 소진돼버린 구태한 용법과 실행은 폐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최근작 <소음을 일으켜라(Bring the Noise)>에서 “인더스트리얼 뮤직, 프리재즈, 구체음악, 사운드 아트에서 파생된 요란하고 추상적인 무조음악(atonal abstraction) 계열”을 중심으로 “노이즈 이펙트”가 부활하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소음’의 개념이 화려하게 되돌아왔다. […] 짜증나게도 이 아티스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낡아빠진 ‘충격 효과’다. 그들은 순수 소음에 뻔하게 ‘위반적인’ 내용(폭력과 악을 옹호하는 낡은 클리셰, 이를테면 연쇄살인이나 네오나치라든가…)을 채워넣는다. 당연하지만 그 소리를 듣게 되는 사람들 중에 그런 것에 충격을 먹을 자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그 꽥꽥거리는 쇳소리를 듣는 관객들은 이미 전향을 끝낸 자들이므로, 그 바닥에서는 혼란이나 도전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뭔가 구제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음이 언제나 관계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레이놀즈는 그 개념이 “귀를 찢는다는 측면에서” 가장 급진적이지 않은 부분이라고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음은 오히려 ‘발명의 보고’로서 유의미하다. 특히 “비(非)음악적 소리를 포섭하고, 실수를 미학화하고, 우발성을 동원하고, 선율과 화성 대신 질감과 충격감을 내세우면서 전진해온 20세기 아방가르드 고전 음악에 대하여, 그 궤적을 반향하는 대중적이지만 팝은 아닌 사운즈”와 관련해서 더욱 그렇다.

이처럼 소음이라는 개념은 포스트-사이버펑크 시대에 미래파의 시간관을 고수하는 것, 즉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를 향해 돌진하기의 어려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외에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우리는 소음을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 잠재성의 장으로 간주하고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탐구해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문화적 무기로서의 음향 효과와 음향전에 관한 미래파적인 관심을 유지하고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데도 틀림없이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소음 내부에 숨어있는 미세한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전에, 소음을 둘러싼 많은 담론들이 엔트로피를 찬양한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소음의 문제를 소음 그 자체가 아니라 소음에서 출현하는 리듬의 문제로 돌려놓고 보면, 진동적 마주침의 정동적 동원력이 훨씬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소음 개념이 부활하는 가운데 일종의 배경막처럼, ‘음향적(sonic)’이라는 용어 역시 최근 급격히 유행을 타고 있다. 이러한 유행은 1980-90년대에 일렉트로닉 음악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비음악적 소리에 대한 미래파와 존 케이지의 개방성을 한층 강화했던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서양 철학의 뿌리깊은 망막중심성을 비판하면서 탈문자 시대에 감각이 재조합될 잠재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처럼 음악 문화에서 음향 문화로 확장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각종 문화 연구적 접근의 개념적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상학적 접근법을 다시 가져와서 청각의 개념 자체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진동의 유물론(vibratory materialism)’은 그저 청각적인 것을 넘어서 더욱 깊은 곳, 인간의 청각 이전에 공감각적인 것의 제일성에 초점을 맞춘다. 음향적인 것은 다른 감각과의 관계와 그 상호성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그것은 리드미컬한 진동으로, 현상학적 주체나 청취자 등의 인간 현존에 종속되지 않는 과잉으로 나타난다. 음향 문화에 대한 정의는 반드시 단일감각적 지각을 초과하는 것, 음향적인 것에 영향을 가하는 음향 외적인 것을 공감각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음향전은 지각의 병참학만큼이나 무(無)지각(과 비{非}소리)의 병참학과 관련된다. 인간의 가청범위는 물질적 진동의 연속체에서 작게 접힌 한 부분에 불과하다. 음향무기에 대한 군사적 연구 자료에 따르면, 이 분자 수준의 연속체는 인간에게 들리는 부분이 포함된 광범위한 진동의 장으로 그려질 수 있다. 지각 가능한 소리의 경계(20-20,000Hz)를 짓는 진동수의 스펙트럼 상에서, 음향적 지각이 다른 감각과 혼성되거나 무력해지는 지대에서는 초저주파 또는 초음파 현상이 나타난다. 가청 범위의 협소한 채널은 한편에서 초저주파의 깊은 어둠에 발을 담그고 다른 한편에서 귀를 찌르는 초음파의 한계선으로 제한된다. 이런 상황에서 음향 문화 연구는 도시의 청각사회성을 속도와 채널의 시스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주머니, 인력의 소용돌이, 음향적 몰입과 마찰의 웅덩이, 다시 말해서 진동하고 휘몰아치는 음향적 힘의 전체 지도로 그려낸다.

아탈리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 코드를 휘젓는 “근본적 소음” 속으로 뛰어들어 탐험할 것을 요구했을 때, 그는 이미 정동(affect)의 중심성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었다. 의미화 이전의 단계에서, “의미론적 연결의 교차”가 발생하는 강렬함 그 자체의 단계에서, 우리는 정동적 음색의 지도를 구축할 수 있다. 나는 지각불가능성과 정동의 이론을 가져와서, 재현, 정체성, 문화적 의미 등으로 논의의 주제를 제한하는 문화 연구 산하 비판적 음악학의 편견을 비껴갈 것이다. 1980-90년대 문화 이론을 지배했던 언어학, 텍스트 연구,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은 지금 여기서 아무 쓸모도 없다. 심지어 아탈리도 소리의 의미에 대한 비판적 음악학의 강박에 반대했다. 그는 음악 그 자체가 “결코 언어와 동등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이 “언어적 유형의 코드와 안정된 호응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약 음악이 언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서사를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말 대신 소리로 코드화된 신화(myth)가 되는 대신에, 그저 “의미 없는 언어”가 될 것이다. 정동은 재현에 대한 문화 이론의 집착을 보충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화 연구적으로 접근하기기에 앞서서 존재론적으로 끼어드는 접근법으로서, 음향적 유물론과 그에 따른 윤리-미학적 패러다임이 가능할 수 있는지 바로 그 조건을 점검한다.

소리를 텍스트의 일종으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여, 내가 여기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힘으로서의 소리다. 결국 ‘음향전’이란 소리라는 힘을 써서 싸운다는 것인데, 그 힘은 유혹적인 동시에 폭력적이고, 추상적인 동시에 물리적이며, 다양한 (생체기계적,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개념적) 음향 기계를 통해 인구, 신체, 군중의 물리적, 정동적, 리비도적 역학을 조정한다. 따라서 인과적, 의미론적 청취, 소위 인지적 청취 이전에, 음향적인 것은 일련의 자동적 반응을 통한 접촉과 전시의 현상이자 정동적 권능의 전체 스펙트럼으로 나타난다. 소리는 피부를 애무하는 유혹적 힘이 있다. 그것은 몰입시키고, 달래고, 신호하고, 치유하고, 뇌파를 조정하고, 체내에서 특정 호르몬의 방출을 유도한다. 음향 무기의 생리적 영향에 대한 논의는 대개 큰 소리의 강도(음향력), 초저주파와 초음파의 효과에 초점이 맞춰진다. 소리의 압력이 너무 높으면 귀는 직접적인 손상을 입는다. 여기서 소음이 다른 촉각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쾌락과 고통 모두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비물질적인 살인 무기가 된다. 진동을 전기적 파동으로 변환해서 두뇌에 전달하는 인간의 귀는 20,000Hz 이상 또는 80dB 이상의 소리와 접했을 때 손상되거나 심지어 파괴될 수 있다. 지적 능력의 감소, 호흡과 맥박의 증가, 과도한 긴장감, 소화 속도의 감소, 신경쇠약, 말투의 변화, 이 모든 것이 환경적으로 과도한 소리에 노출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이다.” 커티스 로즈(Curtis Roads)는 “폭발의 힘이 강력한 음향적 충격파로도 나타난다”고 지적하면서 이 강력한 주파수대와 그 너비를 가리켜 “위험음향도(perisonic intensities)”라고 명명한다.

음향전의 또 다른 개념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에서 일종의 원형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개념은 미래파에서 아탈리와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던 소음과 음향적 폭력의 내재적 관계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어떻게든 포획하지 않고서는 군사화된 투여를 구축할 수 없는 일종의 음향적 게릴라를 암시한다. 그것은 소음과 파괴를 예술적으로 연합하여 위반적인 충격 효과를 노리는 진부하고 관습적인 전통을 답습하는 대신에, 소음을 리드미컬한 잠재성이 진동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사유의 노선을 따라서, “음향 전쟁 기계(sonic war machine)”는 그 리듬의 일관성에 의해 정의되고, 폭력이나 소음을 최우선 대상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다만 정동적 동원과 전염에 총력을 집중한다. 따라서 ‘주파수의 정치(politics of frequency)’는 진동력이 포획, 독점, 재배치되는 방식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개념들의 행렬을 일종의 연속체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음향전이라는 연속체의 양 극단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축, 또는 두 개의 전술적 경향이 있다. 하나는 군사화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전혀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각각 청각사회적 방사(audiosocial radiation)의 확장적 경향과 집중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확장적인 것이 원심적인 것, 밖으로 분출하는 것, 척력을 유발하는 것,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흘러 나가는 운동을 창출하는 것이라면, 집중적인 것은 구심적인 것,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인력을 유발하는 것,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빨려 들어오는 운동을 창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리의 첫 번째 전술적 배치는 분명히 군중을 분산시키고 집단적 에너지를 흩뜨리며 덩어리진 것을 용해시켜 신체들의 운동을 개별화하는 전략적 목표에 복속된다. 반면 두 번째 전술적 배치의 목표는 강렬화하여 집단적 감각의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것, 신체들을 그 원천으로 빨아들이는, 거의 자석처럼 잡아끄는 소용돌이의 인력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은 열과 압력의 측면에서 기상학적으로, 이를테면 “태풍의 눈” 같은 것으로, 또는 유체역학의 난류와 같은 것으로 사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리드미컬한 회전, 강렬함, 집단적 개별화(군중 그 자체를 고유한 신체로 그려내는 것)를 발생시키는 권능이다. 여기서 정동을 강렬하게 동원한다는 제일 목적은 신체를 확장적으로 동원한다는 군사적 목적에 수반되고 아마도 그것을 능가한다.

음향력의 인력과 척력이라는 상반된 경향 중에 어느 게 좋고 나쁜지 따져묻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양가성은 당대 자본주의 내부의 전략과 전술들에 핵심적인 창발적 특성들 중 몇몇을 가리키고 있다. 음향력의 상반된 두 경향이 맺는 상호적 관계는 매우 주의깊게 사유되어야 한다. “음향 전쟁 기계”의 확장적 경향과 신체를 움직이는 그 특정한 능력도 검토해야 하지만, 음향 시스템 기술의 배치에 연관된 일련의 집중적 경향들과 그 정동적 조정력도 살펴봐야 한다.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음향 기계의 원심적이고 반발적인 배치는 군사 및 경찰 기능의 주된 관심사로 매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향 시스템의 구심적 인력을 순진하게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음향전의 전술적, 전략적, 병참술적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흥미로운 음향 문화적 상황은 대부분 두 경향이 혼성되어 나타난다. 이를테면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데로 가야겠다는 느낌이 오는 한편으로, 그 느낌에 저항하는 거의 자율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 나타나 결국 그 자리를 지키면서 계속 즐기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음향적 파시즘은 좋긴 하지만 거부해야 한다는 느낌을 발생시키면서 이 연속체의 양 극단을 모두 점유할 것이다.

나는 철학, 소설, 문화 이론, 대중 음악에서 음향 매체에 대한 핵심적 성찰들을 추출하여 이러한 분석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또한 군사적 도시학을 배경으로 과학과 예술의 교차점들을 검토하여 새로운 세대의 실행가와 이론가들을 움직이는 새로운 감각들을 식별할 것이다. 음모 이론에서도 참조할 만한 것이 많은데, 이는 방위 산업과 관련된 연구 분야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리에 관련된 소설과 도시 전설은 한층 섬세한 철학적 연구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 거짓을 진짜처럼 생생하게 그려내는 편집증적 선정성으로 충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성찰을 상기시킨다. 즉, 음향적(이고 비음향적인) 신체가 음향적 환경에 대하여 언제나 위태로운 프로세스적 불균형에 처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환경에 아주 미세한 동요만 발생해도 그에 공명하는 또 다른 사건이 유도되어 급기야 예측할 수 없었던 문화적 변동이 발생하고 촉발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크 아탈리가 옳다면, 음향 시스템 문화는 음악과 소음을 통해 강렬한 지각적 마주침을 생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동, 지각, 개념으로 무장한 예언적이고 이동 가능한 사회성의 다이어그램을 방출한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여기서 음향-정동 결합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대신에 소리와 두려움의 기이한 접속에 집중하고자 한다.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가 1990년대 초반에 주장하기를, 두려움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정동적 증후군으로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존재에서 식별되는 […] 다중-인과적 매트릭스의 신체에 고유한 것”이라고 했다. 비판적 도시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역시 <두려움의 생태계>에서 이 명제를 긍정한 바 있다. 만약 이들이 틀리지 않았다면, 정동적 동원과 전염의 감각적 전술들을 분석할 필요성은 앞으로 점점 더 시급해질 것이다. 음향적인 것은 특히 두려움의 생태계에서 ‘공포(dread)’의 계열을 검토하기에 적합하다.

음향적 경험은 물리적-감정적 프로세스의 이중성을 가로지르는 공명적 우주의 맥락에 위치한다. 이러한 진동력의 존재론(ontology of vibrational force)을 구축하는 출발점은 문화적 현상을 자연화하여 전술적 개입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자발적 생기력과 해방적 권능의 본체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심하고 기본적인 진동의 평면으로 돌아가서, 21세기 전략적 지정학의 네트워킹된 정동적 전장을 횡단하는 자연-문화 연속체의 비인간적 실체들을 드러낼 것이다. 두려움의 생태계는 “충격과 공포”의 그림자 아래 더욱 강렬하게 생산된다. 음향적 소우주 내부에서 정동적인 것을 둘러싼 비대칭적인 공격과 배치의 현 상태를 연구하는 것은 단순한 음향 문화 연구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의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음향적인 것은 가상성에서 저작권 침해에 이르기까지 새로 출현한 사이버스페이스와 관련 문제들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비가시적이고 공명적인 압력을 향한 입구를 형성한다. 온라인 대역폭이 넓어지면서 소리는 당대 문화의 다중-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핵심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다. 그것은 전 지구적 음악 문화 전반에 걸쳐 공명하는 예측 불가능한 기술경제적 변동을 부추긴다. 따라서 이 연구는 당대 자본주의의 ‘관심의 경제(economy of attention)’에 대한 통찰도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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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1.

이 글에서 언급된 원서목록과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Gilles Deleuze and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trans. B. Massumi (London: Athlone, 1988)
L. Russollo, The Art of Noises (Hillsdale, N.Y.: Pendragon Press, 1986)
Jacques Attali, Noise, trans. B.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
Mike Davis, Ecology of Fear (Vintage Books, 1999)
Simon Reynolds, Bring the Noise (London: Faber and Faber, 2007)
Curtis Roads, Microsound (Cambridge, Mass.: MIT Press, 2001)
Brian Massumi, The Politics of Everyday Fea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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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Sonic Warfare: sound, affect & the ecology of fear>(MIT Press, 2009)에 실린 ‘2001: What is Sonic Warfare’로 저자의 승인하에 번역하여 게재되었음 밝힙니다.

**이 책의 블로그에는 소리문화와 전쟁의 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영상 및 이미지가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http://sonicwarfare.wordpress.com/

***번역자 소개: 윤원화
번역자. 필자. 주로 글을 만지는 일을 한다. 역서로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공역), <컨트롤 레벌루션>, <청각적 과거>(출간 예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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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Goodman (aka Kode9) Steve Goodman (aka Kode9)

Steve Goodman은 영국 Warwick 대학교의 리서치 콜렉티브 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에서 레이브 문화, 사이버네틱스, 포스트모더니즘, 아프로퓨쳐리즘 등을 공부했으며 철학으로 Ph.D.를 받았다. 2004년, 런던의 덥스텝 전문 레이블인 Hyperdub을 설립하여 Burial, Ikonika, Cooly G등의 앨범을 발매했으며 자신 역시 Kode9이라는 이름으로 일렉트로닉 음악을 만들고 DJ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