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이즈/즉흥, 혹은 정치적 예술로서의 음향

정치적 음향예술의 조건

실험음악과 음향예술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요건들을 충족시킬 때 정치적일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음악과 음향예술의 소재가 정치적일 경우에 정치적인가? 그렇다면 정치가의 연설 샘플이나 집회 현장의 소리를 사용하는 실험음악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가? 물론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실험음악이나 음향예술이 진정으로 탈정치적이거나 비정치적일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창작자 자신의 보다 순수한 정치적 입장의 예술로서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며 또한 소재의 수준에서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것에 제한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접근 방식과 방법론, 형식에서 음향을 매체로 하는, 음향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정치적 예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즉 다시 말해서 음향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창조의 과정과 행위 자체가 정치적일 수는 없을까? 그것이 정치적이라고 할 때, 정치적인 것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창조행위와 과정의 원형이 되는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것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되는 권력관계, 혹은 위계에 대한 저항과 대안의 창조/구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자격 있는 주체로 호명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시민권을 인정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경계와 그 경계의 구축방식을 드러내고 분석하는 동시에 이 경계를 공격하고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고안하고 발명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는 불변의 보편적인 진리의 문제와 관련되기 보다는 기존의 수립된 정의(definition)들에 대한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따라서 반대편에 의해 부여된 오명과 그들에 의해 가해지는 비난 속에서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다. 즉 정치적 (음향)예술은 그것이 정치적인 한에서 지속적인 반대와 회의, 비판에 직면하는 동시에 예술에서의 위계와 불평등에 맞서 이들 권력관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접근방식들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노이즈 음악과 (특히 집단성을 전제로 한) 자유 즉흥(free improvisation)은 정치적 음향예술의 대안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장르로서 구분되는 노이즈 음악과 자유 즉흥의 음악적 결과물들은 메르츠바우(Merzbow)와 데릭 베일리(Derek Bailey)의 음악을 비교할 때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노이즈 락 트리오 데드 씨(Dead C)의 브루스 러셀(Bruce Russell)이 제기하는 “자유 노이즈(Free Noise)” 개념이 보여주듯이 노이즈 음악과 자유즉흥의 원리적인 수준에서의 결합과 동맹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비-음악적 소리이자 그러한 소리를 창출하는 행위로서의 노이즈는 음악 바깥에 존재한다. 그리고 즉흥의 자유는 모든 음악적 규칙과 관습에 대한 부정이자 그 외부이다. 따라서 자유즉흥과 노이즈음악은 같은 행위의 서로 다른 측면을 의미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메르츠바우와 데릭 베일리 양자의 차이도 장르적 차이라기보다 개별적인 예술가의 관점의 차이에 보다 더 기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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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즉흥: 평등의 증폭

그렇다면 왜 노이즈/즉흥은 정치적 예술형태일 수 있는가? 노이즈/즉흥에 대한 매우 대중화된 비판과 불만 속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노이즈/즉흥에 대해 가해지는 비난의 핵심은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점이고 따라서 결국 그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 음악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음악이라는 생각은 무엇보다 음악가에게 특수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위계 내에서의) 자격, 혹은 노동의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노이즈/즉흥은 극단적인 자유에 대한 선언인 동시에 음악과 예술에 있어서 극도로 낯선 관념인 평등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이즈/즉흥은 음악과 비음악, 음악적 소리와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 음악의 아름다움과 추함, 음악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악기-생산과정과 정당하지 않은 산출방식, 그리고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음악가/연주자와 그렇지 않은 음악가/연주자 사이의 위계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다.

노이즈/즉흥의 정치적 성격은 연주자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구별을 제거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는 무엇보다 음향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데 청취 공동체로서의 연주자와 관객은 단지 관점과 위치의 차이만 존재한다. 대부분의 무대 음악 공연에서 필요로 하는 모니터―연주자가 자신과 다른 연주자가 연주하는 악기들의 소리를 관객의 소리나 연주 공간 자체의 소리와 분리시켜서 연주자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대 기술―의 필요성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최소화함으로써 소리를 만드는 사람과 소리를 듣는 사람 사이의 위계는 다수의 듣는 사람들 사이의 관점주의로 평등화(equalization)된다. 즉 기계의 힘을 빌어서 보다 정확하게 듣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의 구분이 동등한 수준에서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위치와 위상의 차이로 완전히 전환된다. 그리고 이렇게 봤을 때 음향적 관점에서 연주자와 관객을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무대 자체보다는 바로 모니터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이즈/즉흥은 바로 이러한 무대 예술로서의 음악을 여전히 무대의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실존을 그대로 남겨두더라도, 그래서 무대 위에 있는 자와 아래에 있는 자의 시각적인 영역에서의 구별과 차별을 우회하더라도 순전히 음향적인 관점에서는 위계적 공간을 산출하는 모니터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특정한 성격의 음향예술/음악 형태이자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이즈 음악과 자유즉흥음악에서의 모니터의 불필요성은 순수한 소리 자체를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보는 관점과 직결된다. 소리는 언제나 공간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이는 아무리 음량이 큰 극단적인 노이즈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공간이 없다면 노이즈도 자유즉흥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이즈/즉흥음악가는 공간(특히 공간의 차이)을 청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공간과 무관하게 가장 통제된 소리만을 듣도록 고안된 모니터링 체제와 이 체제가 산출하는 위계는 노이즈/즉흥음악가의 존재 이유 자체와 대립한다. 어디서나 들리는 소리가 일종의 음향적 평등의 첫 번째 단계라면 이제 음향에서의 평등은 듣는 사람의 위치의 고유성과 관련된다.

‘어디서나 들리는 소리’라는 규격화되고 동질적인 평등에의 추구가 (극히 자본주의적인) 전체주의와 같은 형태로의 부패를 향해 나아간다면 노이즈/즉흥은 바로 이러한 부패에 대한 공격이다. 마사미 아키타(Masami Akita)의 다음의 말은 노이즈 음악의 이와 같은 방향을 전적으로 나타낸다. “일본 문화의 효과란 모든 곳에서의 너무나 많은 소음이다. 나는 나의 노이즈로 침묵의 상태를 만들고 싶다. 아마도 그건 소리에 대한 파시스트적 사용법이 될 것이다.” 그는 증폭스피커 없이는 독일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히틀러와 그 후예들에 여전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노이즈 음악가는 스피커를 터뜨리고 증폭장치들을 망가뜨리면서 이러한 자본주의-전체주의적인 소비와 수용의 평등의 체계를 내부로부터 폭파시키려 한다. 토시마루 나카무라(Toshimaru Nakamura)가 (의도했든 아니든)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듯이, ‘스피커를 날려버리는 것은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 표현을 반드시 즉물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노이즈/즉흥음악가는 분명 ‘새로운 야만인’이다. 모든 메시지는 과잉으로 증폭되고 왜곡되면서 파시스트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방식―대량의 통일된 송신자와 수신자의 관계―으로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동시에 메시지의 본질적인 물리적 효과가 드러난다. 하나타라시(Hanatarash)와 준코(Junko), 그리고 프루리언트(Prurient)에 이르기까지 메시지의 전달매체로서의 기능이 제거 된 인간의 목소리/마이크로폰이라는 노이즈 음악의 반복된 주제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노이즈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다기보다는 몸으로 듣는다는 말을 많이 쓴다. 음향의 진동은 음량의 증폭에 의해 고막을 떨리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몸에 직접 진동을 전달한다―흔히 히틀러의 메시지가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신체적-음향적 제스처 때문에 사람들을 움직였다고 말하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그러나 이 진동은 단순히 비트가 아니라 주기와 경련의 교차점이 된다. 소리가 공간 안에서 피드백을 이루는 과정을 시간적 층위로 분해한 앨빈 루시에(Alvin Lucier)의 작품인 “I’m Sitting in a Room”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메시지는 공간과의 상호작용의 중첩에 따라 추상적인 파동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파동은 노이즈 음악의 증폭과 왜곡의 과정에서 극도로 불규칙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가장 긴 주기가 된다. 한편에서는 썬[Sunn o)))]의 초저음 드론 메탈의 긴 파장의 파동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인캐퍼시턴츠(Incapacitants)의 중년 회사원의 극단적 경련이 발생시키는 불규칙한 파동이 양극을 이루는 어떤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증폭은 그 극단에서 결국 메시지 자체를 비워버리고 메시지의 전달 수단마저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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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URIENT, live in Detroit Jul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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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급진주의: 노이즈와 침묵 사이에서

노이즈는 증폭된 침묵이다. 노이즈의 극단적인 증폭은 또한 침묵이다. 디지털 음악 이후(post-digital music)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노이즈의 제거가 침묵이며, 침묵을 깨는 노이즈라는 극도로 단순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시끄러운 소리와 조용한 소리 사이의 극도로 불안정하고 복합적인 관계 설정의 잠재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시끄러운 소리는 단지 작은 소리보다 음량이 큰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피드백이나 오디오 오실레이터, 혹은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귀에 들리지 않는 높은 주파수의 정현파나 노이즈는 스피커의 트위터를 고장 내거나 회로를 태워버릴 만큼 강한 신호이기도 하다. 노이즈와 즉흥연주를 연결시킨 중요한 선례 중 하나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나타났다. 특히 ‘온쿄(onkyo; 音響)’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노이즈와 침묵 사이에 즉흥연주를 위치시킴으로써 노이즈와 즉흥연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였다. 사실 ‘디지털-이후의(post-digital)’ 음악에서 노
이즈란 침묵(silence)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침묵이야말로 새로운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음악 이후 미학의 패러다임의 중심에 놓인 ‘실패(failure)’의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명백한 음향적 표현은 이제 노이즈가 아니라 침묵이다. 물론 20세기의 침묵의 대가인 케이지가 이미 지적했듯이 침묵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인 귀결이란 결코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 침묵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디에나, 언제까지나 소리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음악 이후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No Input”, Toshimaru Nakamura & Sachiko M

그러나 이 새로운 존 케이지적 흐름은 비단 온쿄 운동의 전유물은 아니다. 미국의 노이즈 음악가 케빈 드
럼(Kevin Drumm)의 초기작들과 몬트리올의 실험적인 턴테이블 음악가인 마르탱 테트로(Martin Tetreault)
와의 협연 작품인 “Particles and Smears”에서도 이미 고장 난 기계와 악기로부터 발생되는 가청 영역 경
계선상에 존재하는 노이즈와 침묵의 병치-결합은 이 새롭고 필연적인 경향의 선구적인 사례들이었다. 그것
은 디지털 음악이 열어놓은 음악의 영역 이면에 존재하는 새로운 노이즈와 침묵의 영역에 대한 탐구였다. 
디지털 음악 이전의 전자음악 시대에 존 케이지의 4분33초가 콘서트홀 안과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들, 
기계적이지만 여전히 보다 유기적인 소리들을 음악 안으로 흡수하는 소리 없는 몸짓이었다면, 이제 디지털-
이후의 침묵은 디지털 기술과 음악에 의해 확장된 가청 영역의 경계들을 드러내준다. 오토모 요시히데
(Otomo Yoshihide)와 사치코 엠(Sachiko M)의 듀오인 필라멘트(Filament)의 음악을 이루고 있는 긴 침묵
과 극단적인 음량의 정현파, 그리고 샘플러와 턴테이블이라는 녹음-재생 매체-장치의 순수한 오작동과 오
용에 의해 발생하는 순간적인 잡음들은 바로 이러한 영토의 다중적인 경계선들을 표시하고 있다.

Filament, “Live at Theatre Choo, Seoul, 13 May 2006″

Not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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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소음(騷音)과 잡음(雜音)으로 번역되는 noise는 여기서는 정상적인 음량 이상으로 시끄러운 소리(소음)인 동시에 악음(樂音), 혹은 음악의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고 따라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모든 소리(잡음)라는 의미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에 따로 번역하지 않고 ‘노이즈’로 표기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자유 즉흥(free improvisation)의 개념은 영국의 즉흥음악 선구자인 기타리스트 데릭 베일리(Derek Bailey)의 개념을 따른 것이다. 베일리에 따르면 자유 즉흥이란 특정한 음악 장르적 표현 방식의 범위로 제한되는 관용적 즉흥(idiomatic improvisation)과 구분되는, 그러한 제한을 벗어나는 비-관용적 즉흥(non-idiomatic improvisation)과 동의어이다. 베일리의 개념에 대해서는 Derek Bailey, Improvisation: Its Nature and Practice in Music, Da Capo Press, 1993을 참조하라. 영국의 실험음악 작곡가이자 20세기 즉흥음악의 또 다른 선구자인 코넬리우스 카듀(Cornelius Cardew)는 자유 즉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유사한 관점에서 (그러나 보다 정치화된) 즉흥음악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카듀의 즉흥음악론에 대해서는 Cornelius Cardew, “Towards an Ethics of Improvisation”, Treatise Handbook, Edition Peters, 1971을 참조하라. 카듀의 글들은 최근 에디 프레보(Eddie Prevost)가 편집한 Cornelius Cardew, Cornelius Cardew: A Reader, Copula, 2006에 모두 수록되었다, 카듀의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노이즈 음악과 즉흥음악을 자본주의적으로 상품화된 소통에 맞서는 정치적 예술형태로 제시하는 입장들은 특히 Noise and Capitalism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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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노이즈 자체에 대한 주요 논의를 모두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노이즈와 음악, 정당성을 인정받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의 관계는 결코 역사적 변화 무관하게 다뤄질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이 구분 자체가 주체의 판단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이며 또한 나아가서 “정치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Jacques Attali, Noise: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 trans. Brian Massum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와 Paul Hagerty, Noise/Music: A History, Continuum, 2007을 참조하라.

Not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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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의 필자인 홍철기씨의 노이즈음악 Untitled Feedback은 작가의 동의하에 Sound@Media 오디오 아카이브에서 듣기 및 다운로드가 가능합니다.

Untitled Feedback

노이즈/즉흥음악의 정체성은 언제나 이미 확립된 상태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지속적인 불안정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미 확립된 음악의 정의 등은 여기서 중요치 않다. 노이즈/즉흥음악이란 끊임없이 이미 확립되고 안전한 영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저항하면서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침묵과 노이즈, 일정한 톤과 미시적 혼돈의 노이즈, 순수한 전자음과 비어있는 공간 등 사이에서 불안정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실천을 하는 활동이다. 통제와 자유의 두 영역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중첩과 갈등의 지점들을 창출하면서 이를 통과하는 피드백은 따라서 노이즈/즉흥음악가에게는 본질적인 수단이자 재료일 수밖에 없다. 나의 작업에서의 주된 관심은 음향의 영역에서의 다중적인 경계선상에서 이와 같은 지속적인 불안정성을 증폭시킬 수 있는 관점과 방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데 있다. – 홍철기

Author
홍철기 홍철기 / 노이즈, 즉흥음악가

1976년 서울 출생의 노이즈/즉흥음악가. (카트리지를 제거한) 턴테이블, 믹서 피드백, 노트북 등과 함께 다른 전기-전자장치들을 악기로 사용하며, 주요 프로젝트로는 한국 최초의 노이즈 음악 그룹인 astronoise(1997년 최준용과 결성), 불길한 저음 등이 있다. 주요 관심사는 비음악적 음향을 통한 음악의 변형과 음향에서의 평등의 확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다수의 국내외 노이즈/즉흥음악가들과 협연/협업을 해오고 있으며, 곡사, 이행준 등의 독립/실험영화 감독들의 작품의 음악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최준용과 함께 자주레이블 Balloon and Needle을 통해 국내의 언더그라운드 실험음악을 해외에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3 Responses
  1. d-_-b d-_-b says: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적절히 필요한 생각을 소환해주셔서 고맙고요. 하지만 몇 가지 궁금하거나 토를 달아보고 싶은 내용, 흐름들도 있네요.

    지엽적인 이야기지만, 모니터 부분을 읽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좀 천천히 읽어보았는데요, 모니터에 대한 새로운 관점 자체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새로운 관점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줄 자양분이 될 수 있으므로 딱히 부정할 근거가 없다면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음향 생산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의미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런 부분이 좀 걸리적거렸던 것이예요.

    앞부분에서 언급된 데드씨, 데릭베일리 등의 동영상을 보니까 그냥 모니터를 쓰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특히 데릭베일리 같은 경우는, 모니터에 대한 필자의 관점에서 볼 경우, 그 어떤 록밴드, 재즈밴드보다도 관객과의 위계가 강렬해 보이는 ‘나쁜예’ 였다는 거죠. 심지어 퓨리언트같은 경우는 극장 같은 곳에서 하는 연행을 보니까 1인 연행에서까지도 모니터를 쓰고 있네요. (물론 저같으면 극장의 특징을 감안할 때 당연히 쓸 것을 권장하겠습니다.ㅎㅎ)

    사소한 꼬투리이긴 하지만, 그래서 현실이 글의 주장을 잘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주장이 너무 앞서갔다는 이야기죠. (지금 보니 각 단락이 서로 상관이 없는 즉흥적인 글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모니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재미있었지만, 그리고 뭔가 그 부분이 칼럼의 1/4 이상의 비중이 있어보이지만 그 발상을 현실적인 설득력으로 이끌어낼 그런 논리는 잘 없는 것 같아요. 음향 생산자들이 갖고 있는 어떤 발상같은 것은 재미있고 유익했지만 정치적인 이야기 같은 것은 좀 정치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매사에 논리성, 정치함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요.

    다음에도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2. 홍철기 홍철기 says:

    체계적으로 정리가 안된 글이라는 지적과 현실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다는 지적은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내용을 정리하고 논리적으로 전개하는데 더 의미가 있는 글이었습니다(최소한 글쓴이 자신에게는). 그러나 데드씨가 문제라기보다는 브루스 러셀의 선언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데드씨는 당연히 락밴드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어떤 이야기도 한 바가 없습니다. 메르츠바우도 공연 자체는 당연히 시끄러운 락밴드 공연이나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본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하더군요). 데릭 베일리는 모니터에 관한 내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글의 문맥에서 읽히지 않았다면 제가 글을 크게 잘못썼나 봅니다. 어쨌든 제 관심사는 글에서 다룬 그런 음악들이 경향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방향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에 맞춰져 있었습니다(이 부분이 잘 읽히지 않았다면 글쓴이의 부족함이겠습니다). 당연히 큰 공간에서는 프루리언트도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모니터를 쓸 수밖에 없는 필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측컨데, 그 경우에 모니터는 자신의 소리를 잘 듣기 위한 용도(가 없진 않겠으나)보다는 강한 피드백을 내기 위한 용도일 것입니다. 저런 피드백을 만드는 경우에는 정확한 소리를 모니터를 통해 듣는다는 것이 거의 무의미합니다(직접 경험을 해보시면 더 좋겠으나).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유럽의 궁전의 거대한 연회장에서 연주를 해본 적이 있는데, 어쩔 수 없이 강한 피드백을 만들기 위해서 모니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반면 음악의 특성을 반영해서 스피커를 연주자와 동일선상과 후면에 배치해 준 일본의 한 거대한 창고에서의 연주에서는 모니터 따위는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오히려 정확한 피드백 소리는 공간에서 반사되어 돌아오는 소리(따라서 모니터의 도움없이 관객들도 듣는 그 소리)이지 모니터에서 들리는, 연주공간의 물리적 특성이 최대한 제거된 피드백은 아니었습니다. 노이즈 음악가가 주로 사용하는 피드백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여기서 피드백은 단지 기타/마이크와 앰프에서 만들어지는 일정한 톤으로 한정하기에는 너무나 공간의존적인 불안정한 현상입니다). 사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와 공간의 소리가 같이 들려야 하는데 모니터라는 체제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큰 공간에서 모니터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공간과 음향 시스템 자체가 주로 일반적인 음악이나 다른 예술형태의 공연에서 피드백을 줄이기 위해 설계된 구조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공간 안에 스피커를 설치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시면 되겠는데, 그것이 피드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설계된 구조(제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모니터의 체제’가 바로 이러한 구조와 관련될 것입니다)이기 때문에 음악가가 원하는 강한 피드백을 만들기 위해서는 별도의 앰프나 모니터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역설적인 경우이겠지요(물론 피드백을 사용하지 않는 음악가의 경우는 다른 이야기겠지요). 그만큼 현실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라는 지적은 그래서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음향을 생산하는 구체적인 방식은 너무나 불확정적이며 또한 작가 자신의 관점/실천의 영역이기 때문에 글에는 자세히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현상에서 이를 뒷받침할만한 사례들을 찾기가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이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에서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에서는 단지 그냥 재미있는 발상 정도로만 읽히게 마련입니다. 음향/노이즈 퍼포먼스를 녹음할 때, 녹음으로 포착할 수 없는 아우라(벤야민)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카듀 같은 사람은 이 즉흥음향 퍼포먼스의 아우라로서의 측면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물론 소리는 그 자체로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녹음하고 복제하는 행위 자체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술적으로 보면 녹음을 하는 마이크가 소리의 보편적이고 전지적인 관점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와 관객이 갖게 되는 다른 관점들과 평등하지만 다른) 특정한 관점만을 재현할 수 있다는 측면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피드백이 아니더라도 소리와 공간의 상호작용을 가지고 창조를 하고 연주를 하기 때문에 완전히 일반화하기는 힘들지만 녹음이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프루리언트 류보다는 미세한 소리를 주고 사용하는 온쿄 운동의 음악가들이 주로 이쪽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모니터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즉흥음향 퍼포먼스가 여는 ‘관점주의’적 가능성이란 녹음으로는 정말로 포착하기 어렵습니다(물론 자본과 장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유튜브 비디오는 없다고 봐야합니다(그런 동영상이 있다고 하면 그건 사기입니다). 물론 즉흥음향/노이즈 예술가도 녹음을 합니다. 청취자로 하여금 최대한 자신의 관점을 촉발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녹음을 하거나 보다 전통적인 음악에 가깝게 녹음을 하기도 합니다(혹은 그렇게 해야하는 당위가 노이즈 음악과 즉흥음악의 중요한 미적 규범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녹음을 들을 때, 실제의 음향 퍼포먼스에서의 자신의 관점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녹음을 그러한 준거에 따라 듣고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아주 쉽고 무매개적으로 납득이 되게 만들 수 있는 예를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은 그게 잘 안되더군요. 무매개성이란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에 가장 정교하게 조작된 매개성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3. d-_-b d-_-b says:

    에고. 정성스런 답글을 달아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잘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웹진에 기고한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더 좋은 이야기를 들은 느낌입니다. (이런ㅋ). 모니터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들은 제가 상황을 좀 덜 단순하게 쪼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잘 되었습니다.

    저 역시 홍대 주변에서 공연해본 적도 있고 하긴 합니다만, 약간 동네취미뮤지션 컨셉에다가 또 통기타스러운 것이어서 글쓴이가 이야기하고 계신 사운드에서의 여러 성찰을 쫓아가기엔 좀 무리가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었으므로 뭐라뭐라 댓글을 달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대화, 댓글을 통해 돈도 들이지 않고(-_-)ㅋ 노이즈를 다루시는 분들의 지식과 고민을 한 웅큼 더 거저 줏어먹은 느낌입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글에 종종 들러붙을 계획입니다.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댓글에서도 보이는 어떤 원칙, 지향과 그리고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타협을 요구하는 현실의 객관적, 물리적 환경, 뭐 이런 데에서 드러나는 고민들에 대해 살펴보고 물어보며 그 타협점의 의미들을 얻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의미로까지 이야기가 진전된다면 그 이상의 만족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작업, 글쓰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