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작은 도서관의 책방 한 켠에서 동그랗게 둘러 앉은 엄마와 아이들이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지금 자신이 상상하며 듣고 있는 소리를 이야기하고, 잠시 동안 그 소리를 다 함께 상상한다. 바람소리… 모두들 정말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 양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잔잔히 퍼진다. 이번엔 한 아이가 수줍게 “엄마의 잔소리”라고 얘기하자, 모두들 웃음바다가 된다. 내가 라디오교육을 시작할 때 가장 처음 하게 되는 소리놀이의 한 장면이다. 소리놀이 시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오직 소리만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놀이를 통해 이해하는 수업이다. 일상에서 많은 정보들은 눈을 통해 들어온다. 우리는 소리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눈을 감게 되면, 처음에는 불안해진다. 하지만 곧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에 집중하게 된다. 자 그럼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잠시 눈을 감고 다음 소리를 듣고 어떤 소리일지 상상해보자. 소리여행: 대구 성서공동체FM 4기 by soundatmedia 동네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처음 만들게 된 이 초등학생 친구는 소리여행을 주제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을 직접 녹음하고 청취자들에게 “이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라고 질문을 던진다. 쉽게 알 수 있는 소리도 있지만, 아무리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감을 잡기 어려운 소리도 있다. 정답을 말해주면, 그제야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된다. 라디오라는 ‘소리’로만 소통하는 미디어를 만들고 가르치는 나는 교육을 할 때마다 ‘소리’를 잘 듣는 법을 강조한다. 영상매체가 넘쳐나는 요즘 구닥다리 라디오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지만, 의외로 소리로만 상상하게 해주는 이 신기한 기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꽤나 높다. 특히 자신들이 직접 그 소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그 즐겁고 유쾌한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기도 한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삶과는 아주 동떨어진 꿈같은 세계의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비정할 정도로 정확한 표준어 발음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던 유식한 말들. 농사꾼에게는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던 재담과 만담들. 그런데 오늘 그 스피커에서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 먼 세상의 번듯하게 생긴 인사들의 기름진 목소리만 나오던 스피커에서 일석이네 어머니의 우거지 먹은 목소리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구성진 사투리에 정돈되지 않은 어눌한 말투, 우리 주변에서 늘 듣던 그 평범한 목소리들이 스피커를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는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그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동네의 다양한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공동체 라디오, 소리로 만드는 공동체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1906년, 음악과 이야기는 전파를 타고… 그런데 잠깐! 무선통신 기술이었던 라디오가 ‘방송’으로 자리 잡게 된 그 오래된 사연이 궁금하지 않나. 지금은 ‘라디오’하면 당연하게 ‘방송’을 떠올린다. 진행자들의 구성진 입담과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세상일 돌아가는 뉴스가 전해지고, 흥미진진한 라디오 드라마를 들을 수 있는 ‘방송’ 말이다. 그런데 라디오가 처음 발명된 그 시기에도 사람들은 전파에 사람들의 이야기와 노래를 실을 생각을 했던 것일까? “라디오는 분배 체계에서 의사소통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라디오가 방송용으로뿐 아니라 수신용으로도 쓰일 수 있게 되면, 즉 청취자가 듣기만 할 뿐 아니라 말하기도 하며, 청취자를 고립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쓰일 수 있게 되면, 라디오는 가장 강력한 매스 커뮤니케이션 장치, 즉 아주 환상적인 채널 시스템이 될 것이다. 라디오가 현재 갖고 있는 분배 기능은 폐기되어야 한다. 라디오는 청취자 자신들에 의해 조직되어야 한다.” 라디오의 시작은 누구나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자유롭고 참여적인 기술이었을지 몰라도 1920년대 이후에는 국가의 선전방송으로, 기업들의 영리적 목적으로 돈벌이에 이용되었다. ‘전파’라는 신비한 존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었지만, 오랫동안 라디오는 정부와 기업들의 차지였다. 국가는 기술적으로 송수신이 모두 가능했던 라디오를 허가받은 방송사들의 일방적 송신과 뭇 대중들의 일방적 수신 체계로 재편함으로써 사회의 의사소통 방식의 폐쇄성과 독점을 강화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라디오 전파에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였다. 듣기만 하던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노동자, 소수 인종, 여성, 빈민, 농민들은 허가 받지 않은 라디오를 통해 세상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하였다. 글을 알지 못하는 문맹자들도 라디오를 듣고 또 쉽게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 운동은 장비 압류와 감금, 때로는 목숨까지 감수해야 하는 힘겹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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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륨을 높여라! 해적방송에서 공동체 라디오까지 : 영국 1960년대 이후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해적방송’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였다. 해적방송(pirate radio)이란 이름이 붙여진 까닭은 정부로부터 전파 사용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로 해안가나 배를 타고 다니면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를 전후로 주로 해안가와 바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해적방송은 68혁명기, 정치 사회적으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새로운 가치들이 솟구쳐 오르던 정치적 격변기에 다양한 저항 문화들의 창조 속에서 도시 내부로 들어온다. 물론 해적방송이라 하여, 모두 정부의 전파 독점에 반대하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해적방송을 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상업방송을 하고 싶지만 면허를 못 받은 사람들도 있고, 특정 음악에 대한 마니아층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방송하기 위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시나 대학가에서 조그맣게 지역적으로 운영되었던 공동체 방송들도 있었다. 2004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한 영국공동체미디어협회(UK Community Media Association)의 창립자이자 세계공동체라디오방송연합(AMARC)의 의장이었던 스티브 버클리는 자신의 해적방송 경험을 이렇게 회고한다. “해적 라디오에 있어서 트랜지스터 기술을 통한 송신기 제작이 가능해진 점이 중요했다. 몇 십 달러만 가지고도 장비를 구입하여, 몇 가지 전기공학과 간단한 도구만 있으면 라디오 송신기를 만드는 것이 집에서도 가능했다. 그래서 법규제와는 무관하게 해적 라디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나는 한 두 시간정도 방송을 했다. 방송을 녹음한 카세트 테잎, 오토바이 배터리, 그리고 집에서 만든 송신기를 들고 언덕에 올라가서 방송을 했는데, 언제부턴가는 감시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차라리 법 개정 운동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해적방송을 하면서 중요한 교훈은 우리 스스로가 송신기를 만들고 방송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 스스로가 방송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적방송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자, 영국 정부는 더욱 강력한 전파 감시와 단속을 실시하였다. 하루하루 압류와 체포에 대한 우려와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해적방송을 지속해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티브 버클리와 활동가들은 해적방송에 안주하지 않고 공동체 라디오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2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끈질기게 정부를 설득했고, 시민들에게 공동체 라디오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 어린이 방송(Takeover Radio / 103.2 FM / www.takeoverradio.co.uk) 1년의 파일럿 프로젝트 기간 동안 라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과 공동체 라디오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성과들을 바탕으로 2004년 장기간 24시간 운영되는 공동체 라디오 법률이 영국 역사상 최초로 제정되었다. 라디오가 공동체의 손에 돌아오는데, 꼭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Ofcom, Community Radio : Annual report on the sector 2009/2010 믿기 어려웠다.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이렇게 컸던가.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인식 확장과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힘쓴 활동가들의 노력은 이렇게 30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자원활동가들이 방송을 만들기 위해 방송국을 드나들며, 영국 전체적으로는 매주 평균 25000명이 넘은 자원활동가들이 방송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비록 전파가 반경 5km를 넘지 못하는 아주 작은 방송국이지만, 방송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로는 BBC와 같은 큰 방송국들의 규모를 이미 뛰어 넘었다. 사실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라디오가 영국에서 실천하고 있는 사회적 역할들이다. <공동체 라디오 만들기 : 영국공동체라디오핸드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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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동체의 목소리가 첫 전파를 타다 2005년, 대구 성서공동체FM 개국을 시작으로 전국 8곳에 공동체 라디오가 전파를 쏘아 올렸다. 방송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90년대부터 해외의 공동체 라디오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전파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진전되었다. 그동안 군사독재,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국가권력은 주파수를 틀어쥐고 개방하지 않았고, 허가 받지 않은 방송을 하거나 청취하는 행위에 대해 엄하게 처벌하였다. 물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산업 활성화라는 경제적 가치가 대세가 되면서 상업방송이나 새로운 통신시장에 주파수를 할당하는 것으로 정책의 중심이 변동하였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공동체들에게 돌아갈 주파수는 없다는 정부기관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2004년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는 영국의 파일럿 프로젝트를 참고하여 소출력 라디오 시범방송 사업을 공고하였고, 그 해 11월 시범방송사업자로 8지역을 선정하게 된다. 수도권은 관악, 마포, 분당, 비수도권 지역으로는 충남 공주, 경북 영주, 대구(성서), 광주(북구), 전남 나주에서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공동체 라디오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4년 11월 16일 방송국 임시사무실은 시범사업자로 선정되어 환호성과 축하인사로 정신이 없었다. “앞으로 우야노?” 라는 주변의 걱정은 뒤로 하고 ‘내일부터 걱정해도 늦지 않으니 오늘만은 마음껏 자축하자’ 하면서, 서류작성하고 면접하고 초조하게 기다린 2달여 기간의 피로를 기분 좋게 풀었다. 그로부터 시간은 안개 속을 걷듯 한발 한발 더듬더듬 걸어온 역사였다. 최초의 시도! 이것은 복병처럼 숨어있는 수많은 난관을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과정이었고, 더욱이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온전히 자력으로 헤쳐 나가야 된다는 난망함이었다.” 방송편성에서 제작, 기술, 운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새롭지 않은 게 없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그 막막함 앞에서는 최초로 공동체 라디오를 시도한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공동체 라디오의 그 지극한 매력도 느낄 여유가 없었노라고 공동체 라디오 활동가는 고백한다. 허가를 내준 기관에서 요구하는 서류와 씨름하랴, 방송의 ‘방’자도 모르는 동네 주민들 교육시키랴, 1분 1초도 펑크가 나서는 안 되는 방송스케줄 관리하랴, 공동체 라디오 하겠다며 밀려드는 자원활동가들 맞이하랴… 3-4명의 방송국 상근 인원으로 이 모든 것을 해 내야 하는 상황이 상상이 되는가. 그러나 이 작은 방송국들은 해냈다. 공동체 라디오에 대한 변변한 정보 하나 없던 시절부터, 역시 모르기는 매한가지인 방송위원회의 갈팡 질팡 정책적 혼란 속에서도, 재밌게 잘 듣고 있다는 동네 사람들의 응원에, 평범한 아줌마, 노인, 상인, 이주노동자들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웃고 울며 이야기하던 그 왁자지껄한 사람소리에 시범방송의 어려움들을 이겨나갔다. 공동체 라디오 방송은 기존 방송과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공동체 라디오만의 매력인가? “인기 있는 방송국이 아니라, 필요한 방송국”이 되려는 게 공동체 라디오의 지향이다. 큰 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우리 동네 소소한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 소외되고 배제당한 사람들의 확성기가 되어 주는 곳, 동네의 다양한 소식들이나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공동체 이슈들이 제기되고 주민들 사이에 공론이 펼쳐지는 곳… 잘 나가는 연예인 DJ는 없어도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은 청취자로만 있던 사람들을 방송 마이크 앞으로 이끌었고, 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고,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시험방송 기간에도 공동체 라디오방송국들은 노인, 장애인, 청소년, 아줌마, 노동자, 성적소수자 등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는 방송들을 편성하였으며, 지역의 환경, 재개발, 먹거리, 교통,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지역 이야기들을 주민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냈다. 1w(와트) 출력이라는 한계로 들리지 않는 곳들이 너무 많아지자, 방송을 전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CD 배포로 부족함을 채워 나갔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절실함이었다. 담장 허무는 엄마들 from Sound@Media on Vimeo. 중증장애아를 둔 엄마들이 만드는 방송 ‘담장 허무는 엄마들’ 애초에 1년의 기한으로 시작되었던 시험방송은 무려 4년이 넘게 이어졌다. 2006년 공동체 라디오 방송 관련 법조항이 개정되었지만, 정부는 공동체 라디오 방송의 정식사업 전환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앞서의 영국 사례와는 아주 대조적인 행보였다. 정식 사업자 지위를 확보하지도 못하고, 정부 지원도 모두 끊긴 상황에서 시험방송국들은 생존을 위한 길 찾기에 나서야 했고, 동시에 정부를 상대로 한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8개 방송국 외에도 공동체 라디오 방송을 준비해왔던 지역과 공동체에서는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허가를 기다리는 상황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결국 2009년 8월 방송통신위원회는 기존의 시험방송국 중 나주를 제외한 7개 방송국에 정식으로 공동체 라디오 방송 면허를 허가했다. 아직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축제 기간 등을 이용해 한시적으로 미니FM 방송을 하면서 공동체 라디오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다. 미니FM은 기존 FM 주파수를 활용하여 1W(와트) 미만의 출력으로 경기장이나 박람회장 등 행사 기간 중에 한시적으로 운영하거나 관광지, 공원 등에서 안내정보 등을 제공으로 상시 운영할 수 있는 방송이다. 미니FM은 공동체 라디오를 위한 실험장이기도 하다. 방송을 전파로 보내는 과정에 대해서 알고, 방송을 모르던 사람들이 라디오 제작 경험을 얻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이 기간 동안 공동체 라디오 방송에 대해 말이 아닌 방송으로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라디오 방송에 관심이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동네 행사나 축제 때 미니FM방송을 해 볼 것을 적극 권한다. 진안마이FM from Sound@Media on Vimeo. 미니FM 진안마이라디오 / 90.7 Mhz / 전라북도 진안군 / www.jinanmaeul.com “방송이 나가고 있는데 누군가 스튜디오 문을 계속 두드리시는 거에요. 문을 열었더니 마을 주민이셨어요. 진안마이FM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시다가 음악이 끝나고 ‘지금은 진안마이FM을 듣고 계십니다.’ 이 멘트를 듣는 순간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공중파 방송에만 익숙해 있던 우리 동네에 방송이 생겼단 말에 얼마나 좋던지, 그 마음을 전하려고 일부러 스튜디오까지 오신 거죠. 그분이 고개를 꾸벅 숙이시면서 감사하다고 하니까, 그때 방송 진행하던 진안 주민들이 다들 감동 받아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좋아하셨지요. 정말 진안 지역 그리고 더 넓게는 방송매체에서 소외받는 지역에 공동체 라디오가 잘 진행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역의 경우, 공동체가 직접 주파수를 소유하지 못해도 기존의 지상파 라디오 방송 시간을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라디오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이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2001년부터 시작된 마산MBC의 청취자 참여프로그램은 그 역사가 길다. 중간에 심의를 둘러싼 마찰로 중단된 적도 있으나, 현재는 창원MBC <열려라! 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북CBS는 <시민, 전파를 타다>를 편성한 바 있으며, 부산MBC의 <라디오 시민세상>에서는 지역 현안과 부산지역 주민들이 사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시민들이 직접 제작 방송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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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가 아니어도 우리는 소통한다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던 영어FM이 (없다던 주파수를 찾아내) 개국을 하고, 한나라당이 날치기 처리한 미디어법으로 신규종합편성채널이 곧 설립된다는 뉴스들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공동체 라디오 허가가 났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큰 미디어들의 난립 속에 공동체 라디오와 같은 작은 미디어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아무리 주파수가 없다는 핑계로 공동체 라디오 허가를 안 내준다 해도 세상과 소통하려는 사람들의 열망까지 잠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동네 골목 시장에서, 이주민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에서, 그리고 생존을 외치는 투쟁 현장에서도 소리들은 세상의 담장을 넘고 있다. 오산이주노동자라디오(www.owcc.or.kr)는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문상조차 가지 못하고 마냥 울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심정을 전할 수 있는 라디오, 한국에서 법제도를 몰라 구제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정보 매체 라디오, 이주노조를 선전하고 교육할 수 있는 라디오, 이주노동자들이 자국어로 소통하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라디오”를 상상하며, 2007년 미디액트(www.mediact.org)와 관악FM(www.radiogfm.net)의 지원을 받아 인터넷라디오방송을 열었다. 성남시 중원구에 위치한 재래시장 상대원시장에 가보면 가게들마다 같은 모양의 스피커가 달려 있다. 이 스피커에서는 시장의 오래된 명물 원다방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방송국 ‘원다방’의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온다.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고 시장에서의 만남과 소통을 엮어나가는 라디오방송국 원다방은 동네 주민들이 스스로 기획 제작, 운영하고 있다. 점심 먹고 나른해지는 시간, 시장 스피커에서는 체조 음악이 흘러나온다. 상인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풀기도 하고, 흘러간 유행가를 따라 부른다. 처음에는 시끄러워서 장사를 못하겠다던 상인들도, 방송이 나오지 않는 주말이 되면 시장이 쥐죽은 듯 고요하다며, 이제는 라디오 방송 없으면 허전하다고 하신다. 종종 스피커가 고장을 일으켜 방송국 전화가 바빠질수록, 언젠가 FM 주파수를 쏘며 진짜 라디오 방송을 해보고 싶어 하는 원다방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도 점점 커져간다. 2009년 다섯 철거민이 죽어간 용산참사 현장에서 행동하는 라디오 ‘언론재개발’은 스피커방송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길거리에 라디오부스가 차려진다. 햇볕 아래 뜨끈해진 라디오 믹서와 노트북, 그리고 마이크 2대가 방송 장비의 전부다. 용산철거민들의 사연이 길거리에 퍼지고, 거리에서 받은 신청곡이 나오고, 간혹 즉석 노래자랑이 펼쳐지기도 했다. 24시간 시동을 켜둔 경찰버스의 소음과 경찰들의 감시 속에서도 행동하는 라디오는 1년이란 시간동안 용산의 소리를 전했고, 이제는 홍대의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방송을 계속하고 있다. 행동하는 라디오 from Sound@Media on Vimeo.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 여러분! 철거민들은 죄인이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개발악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철거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려고 정말 살아보려고 올라간 망루였습니다.” 디지털 시대, 그리고 공동체 라디오의 미래 강릉에서 라디오 교육을 하면서 유럽의 네덜란드에는 260여개, 프랑스에는 600여개, 태국은 허가받지 않은 라디오까지 포함해 3000여개의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고 하니, 사람들 입이 떡 벌어진다. 한 중학생 친구가 질문을 한다. “근데, 우리나라 정부는 왜 우리한테 주파수를 안줘요?” 너무도 당연한 궁금증이다. 전파의 소유권을 굳이 따지자면, 그 나라의 시민들 것이 아니겠는가. 정부와 기업들이 독차지한 주파수의 일부라도 시민들에게, 공동체들에게 환원하는 것이 상식적인 정책이 되는 날은 언제나 올까. |
[칼럼] 소리로 만드는 공동체: 영국과 한국의 공동체 라디오
2 Responses





어린이 디제이 정말 수준급입니다. 사과 깍는 소리도 다르게 들리는군요. 재미있고 신기해요.
좋은 글 잘 읽고 배우고 갑니다.
라디오에 얽힌 추억과 잘 몰랐던 라디오의 역사(아마츄어 햄과 관련하여)를 반추하게 되어서 즐거웠습니다.
아울러, 브레히드트가 강조하는 소통 도구로서의 라디오는 오늘날 인터넷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