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더러운 대기 : 소음 · 앰프 · 국가

1. 더러운 대기

1960년대 말까지 서울의 인구는 500만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서울은 만원이었다. 교통량이 늘어나고 건축 토목 공사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경제개발 붐을 타고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했다. 발전을 의식할 틈도 없이 대책 없이 부풀어 오르기부터 하는 도시가 서울이었다. 특히 뚝섬지역은 서울에서 최악의 주거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온갖 크고 작은 공장이 모여 있어서 소음과 매연이 극심한데다가 여름 장마철이면 수해까지 반복됐다.i)
1968년 한 해 동안에 서울시에 진정된 공해건수의 50%는 ‘소음’이었다. 같은 해 대한산업보건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영등포지역 공장 직공 가운데 남자 529명, 여자 278명을 진찰한 결과, 남자는 29.9%(177명), 여자 23%(64명)이 직업적인 청력장애자였다고 한다.ii) 또 다른 통계에서도, 조사대상 35만 2905명의 노동자 가운데 11.2%인 4만 2874명의 노동자들이 청력이상과 더불어 분진으로 인한 진폐증, 폐결핵을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iii)
1969년이 되면 서울시내의 평균 소음도는 79.5폰에 이르게 되는데, 그 증가치는 1967년보다 1.5배, 1965년보다 3.5배나 늘어난 것이었다.iv) 일반적으로 60폰 이상의 소음은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고 한다.v) 서울은 1963년에 평균소음이 60폰을 넘어섰고vi), 1966년의 조사에서는 89폰까지 측정되기도 했다. 소음공해에 있어서만큼은 서울은 일찌감치 세계 으뜸 도시였던 셈이다.
이쯤 되면 이 도시는 사람들에게만 괴로운 장소가 아니었다. 1964년에는 창경원의 동물 25마리가 폐사했다.vii) 원인은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경향신문 7면, 1964.3.6 소음 노이로제로 죽은 꽃사슴

도시의 ‘소음’을 줄여야 했다. 시민들은 그 역할을 마땅히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문에서도 소음방지에 정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박정희 정권도 1963년부터 공해방지법을 준비했으나, 실제 이 법이 발효된 것은 1967년 3월 21일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면 그 사이엔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1965년에 전국 36개소에 ‘공해방지구역’을 지정하긴 했으나 관련법이 통과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실효성 있는 단속이 이뤄질리 없었다. 한마디로 전시행정에 불과한 조치였다. 정부의 공해방지 활동이 지리멸렬한 사이, 서울의 대기오염 · 소음 · 하수 오염도는 안전기준을 훨씬 뛰어 넘어 위험상태로 치닫게 된다.viii) 하지만 박 정권은 공해문제 해결에 조급해하지 않았다. 1965년 한국이 ‘도약단계’에 있다는 로스토우의 발언 이후로, 박정희는 성장주의에 자신감을 갖고 개발독재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시작했다.ix) 공해 단속도 기업 활동에 무리를 주지 않는 선에서 이뤄졌다. ‘공해방지법’이 표류했던 1963년에서 1967년까지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에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가 ‘경제개발’, ‘조국근대화’의 기치를 높일수록 ‘더러운 대기’는 필연적인 부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말 문제가 되는 ‘소음’은 자동차 경적이나 밤낮으로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소리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차라리 국가발전의 찬가나 마찬가지였다. 박 정권이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소음’x)은 무엇이었을까? 그 소리에 그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것이 이 글의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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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뚝섬지역>,《매일경제》5면, 1969.6.10.
ii) <공해 가공할 정체 (3) 소음>,《경향신문》7면, 1969.11.26.
iii) <질환에 힘 잃은 노동력>,《동아일보》3면, 1968.1.6.
iv) <공해 날로 가중>,《경향신문》8면, 1969.4.16.
v) ‘폰phone’은 소음계로 측정한 음압 레벨의 단위로 감각적인 음의 크기를 나타내는 양이다. 60폰은 1,000Hrz, 60dB이다.
vi) <소음 소음 소음 서울은 평균 60폰 이상>,《조선일보》6면, 1963.7.9.
vii) <단한마리밖에 없는 꽃사슴이 소음의 노이로제에>, <동물원 백서, 종말만 기다리는 슬픈 가족>,《경향신문》4면, 1964.3.6. ; <동물원 이전할 수 없나. 벌써 25마리나 희생>,《조선일보》7면, 1964.1.23.
viii) <오염 서울 (상) 대기>,《경향신문》6면, 1966.7.20.
ix) 김건우,「1964년 담론 지형 :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성장주의」,『대중서사연구』제22호, 대중서사학회, 2009, p.73.

2. 1960년대의 ‘소음’

소음문제 해결을 정부 당국에 진정하는 일이란 애초의 간명한 의도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맥락의 사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저 생활의 불편을 해결해 달라고 했을 뿐일지 모르나, 동시에 ‘소리’와 ‘공간’에 대한 정부(국가)의 통제력을 ‘증명(證明)’하는 일도 수행한 셈이 된다. 이른바 ‘소음관제를 요청한다’라는 말에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때 국가는 앰프(amp)의 기능에 유비된다. 앰프는 소리를 증폭시키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소리의 볼륨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이면서, 다양한 소리의 섞임을 조정할 수 있는 기계이기도 하다. 물론 앰프가 모든 소리에 대해 완벽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치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통제력은 소리 그 자체를 다루는 게 아니라 전기적인 조작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국가도 사운드스케이프 혹은 음향공동체를 산출하려 한다. 국가가 (라디오, 텔레비전, 스피커, 앰프 등의) 전기 미디어를 통해 ‘공간’을 장악하고 사람들의 ‘정동(affect)’xi)에 미치는 영향력이란 실로 위력적이다. 5·16쿠데타의 최초 점령목표도 남산의 중앙방송국이었다. 그날 새벽 5시, 전국에 이른바 ‘혁명공약’이 방송되고 오전 9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쿠데타는 시민들 앞에 우선 사운드스케이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전국적인 앰프村 건설을 비롯하여 방송검열, 왜색가요 단속, 계엄령, 야간통행금지(통금) 등등의 조치를 통해 편집증적으로 국가의 사운드스케이프, 국가라는 음향공동체를 반공과 개발독재의 주조음 아래 직조(織造)하고자 했다.


동아일보 4면, 1962.7.19 앰프의 배선을 조정하는 과정

1964년 7월, 6·3사태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던 어느 날의 일이다. 계엄사 치안처(治安處)는 매연과 소음에 대한 일제 단속을 벌여, 7월 9일부터 13일까지 매연 933건, 취명(사이렌) 134건, 그리고 상당수의 확성기 소음에 대해서도 고발조치했다.xii) 명목은 매연·소음 단속이었지만 실상은 정치집회 단속이었다. 1962년부터 서울시내 24개 처에서 운영됐던 음향관제 구역의 주 업무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에 반대하는 소리가 관제되어야 할 ‘소음’이었던 것이다.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로 3·24 시위에서 불붙기 시작한 한일협정 반대시위의 기세는 꺾이게 된다. 신문과 방송에선 이 사태에 대한 제대로 된 보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가 방송현업인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한 ‘앵무새 사건’이 6월 4일의 일이었다.xiii) 다들 찍소리도 낼 수 없었다.
계엄령 동안에는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금시간을 앞당겼다. 통금의 밤은 국가의 사운드스케이프가 위세 등등하게 현현하는 시간이었다. 도둑 쫓던 시민도 “통금위반이다”이라는 말엔 그 자리에서 멈춰야 했다.xiv) 야경원들이 통금위반자를 폭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xv)『청맥』창간호(1964.8)에 실린 백인빈의 단편소설 「반짝이는 것과 빗소리」에서 통금위반자는 억울함을 이렇게 항변한다. 통금이 시민들의 신체와 정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임마, 말할게 들어라! 내가 제미붙은 무슨 통행금지 위반을 했다는 거야! 난 싸이렌이 울리기에 그 자리에 들어누었던 말야. 한 발자국도 더 떼지 않았단 말야. 아, 통행을 했어야 통행금지 위반이지 움직이지도 않은 내가 통행금지 위반이란 말이냐! 야 임마! 말이 막히니까 주먹질이지? 넌 에미 에비도 없냐,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새끼야!”(110p)

이 소설에 묘사된 장면들을 살펴보면, 통행금지 위반으로 야경원에 연행된 사람들은 우선 파출소로 옮겨져 조서를 쓰고 지장을 찍게 된다. 그런데 통금위반자의 수가 매일 밤 워낙 많다보니 파출소 보호실에 빈자리가 없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마다 경찰은 통금위반자를 차에 싣고 아직 자리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통금 시간이 끝났다고 보호실에서 바로 풀려나는 것도 아니다. 훈방 되더라도 한낮이 다 되어서야 보내주기도 했다. 즉결심판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훈방될 때는 우선 담당 경위에게서 위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일장 훈화를 들은 뒤, 백지 한 장씩에 시말서를 쓰고 나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고 통금 전에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서울은 교통지옥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xvi) 통금직전에 과속으로 달리던 택시가 사람을 치었다는 기사xvii)도 적잖이 발견된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야간통행금지를 시작한 이래로 이런 일상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됐다. 이 반복은 국가의 사운드스케이프를 박동하는 주요한 리듬이 되었다. 이 리듬과 함께 국민의 신체에 권력이 기입된다. 밤의 대기를 관통하는 통치권자의 힘 앞에서 사람들은 조급해하고, 두려워하고, 낭패감을 느끼고, 당황하여 꼼짝할 수 없고, 끝내 비굴함을 느끼는 정동의 지배를 받는다. 통금의 밤은 한낮의 번화가의 ‘소음’과 비교해 훨씬 조용한 상태일지 모르나 ‘소리’와 ‘공간’, ‘정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집요하며 유해하다.


조선일보 3면, 1960.4.16 통금위반으로 잡혀온 시민들

그런데 통금의 밤은 순도 높은 박 정권만의 사운드스케이프였던 것은 아니었다. 대기에는 ‘붉은 소음’xviii)이 스며들어 있었다. 남한에서 북한방송을 듣는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의 전파는 휴전선 따윈 상관 않고 라디오 수신기로 날아들 수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63년 1월엔 대구의 한 소년이 마을 앰프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북한 방송이 나가는 바람에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된 일도 있었다.xix)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를 보면, 일제 총독부 잔당들의 해적방송 ‘총독의 소리’를 깊은 밤 경청하는 시인이 등장한다. 이 연작 소설이 처음 발표된 때가 1967년이었다. ‘총독의 소리’의 방송내용도 제6대 대통령 선거 및 제7대 국회 의원 선거 종료를 즈음한 논평이었다. 총독은 논리정연하게 작금의 한반도 정세를 분석하고 자신들이 알제리의 파시스트들과 연대하고 있음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 목소리와 의지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지만, 방송이 뚝 끊긴 뒤에 또렷이 떠오르는 통금의 밤은 더욱 무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온갖 억압된 것들의 소리가 귀신처럼 시인의 내면에 울려 퍼진다.

지척지척 내리는 빗소리와 아울러 들려오던 방송은 여기서 뚝 그쳤다. 그는 어둠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창틀을 꽉 움켜잡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더 어두운 소리들이 그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피아노 치는 손마디 소리, 부스럭대는 엽전닢 소리, 올빼미의 목쉰 울음. 어딘가에서 다리미질하는 은밀한 소리, 니나노 니나노, 창백한 손마디에 쌍가락지 끼는 소리, 눈구멍에 최루탄이 박힌 아이의 신음 소리, 유세장에 실려 가다가 객사한 늙은 아이들의 허기진 울음, 총독의 피묻은 너털웃음. 시인의 흐느끼는 소리 ― 오 아시아의 비극의 밤은 길기도 함이여. 그리고 아주 가까이 아주 아주 가깝게 들리는 소리. 아구구아구구아구구구아구구구구. 비명. 아구구아구구구아구구구구구. 뱃소리와 범벅으로 어우러져 들려오는 그 많은 소리들 가운데서 제일 가깝게 들려오는 이 소리는 그의 목구멍 속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총독의 소리」,『총독의 소리』, 문학과지성사, 1999, pp.87~88.)

박정희는 통금이나 검열, 계엄령과 같은 억압수단뿐만 아니라 앰프村의 확대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1964년 연두교서에서도 농어촌의 앰프 증설과 방송의 공정성 강화에 의지를 밝혔다.
앰프村는 “거미줄처럼 마을 구석구석”에 침투한 “관(官)의 선전망”이었다. 1967년 대선과 총선을 앞뒀을 때는 밤낮으로 선전방송을 틀어댔다.xx) 1963년 대통령 선거 때에도 경찰이 직접 나서서 “국영방송 중계하라”고 간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xxi) 주로 박정희의 수출주도 계획경제의 결실을 알리는 내용이었고, 그의 정치적 인기도를 높이는 데 적잖이 도움을 줬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수 없는 문맹의 촌노(村老)도 마을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박정희의 업적을 듣고 그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라는 거대한 ‘앰프’는 공포와 폭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박정희를 지지하게끔 하는 정동적 동원과 전염이야말로 이 ‘앰프’의 가장 위력적인 효용이었다.xxii) 결국 박정희는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에게 1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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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소음규제 조례 등에서는 ‘소음’을 허용한도 데시벨을 넘은 ‘큰 소리’로 정의하고 있다. 이밖에도 ‘원하지 않는 소리’, ‘신호체계를 교란하는 것’ 등으로 ‘소음’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소음’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용어이다. 모든 소리가 ‘소음’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침묵’조차 ‘소음’이다. 왜냐하면 ‘소음’이란, 누구의, 어떤 기준에 의한, ‘어떤 상태의 소리’가, 또 한편으로 어떤 종류의 ‘소리내기’가, 어떻게 규정되고 활용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데시벨의 숫자 따윈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소음’은 정치적이면서 권력적이다. 그리고 ‘소음’은 ‘소리’와 ‘소리내기’에 대한 상반된 감각과 지각, 실천들의 와동(渦動)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어떤 권력에게는 반대자의 ‘침묵시위’조차 소음일 수 있다. 독재자의 프로파간다 역시 그의 폭압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음’이다.
xi) ‘정동(情動, affect)’은 자신에 의해 표현되고 타인에 의해 경험되는 감정경험을 뜻하며,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신체’의 어떤 한 상태가 아니라 ‘존재 능력의 연속적인 변이’를 문제시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국가와 자본은 (아울러 이에 유착된 온갖 권력들은) ‘정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될 수 없도록, 우리의 ‘신체’를 훈육하고 정동을 통제한다. 군대는 이러한 현상을 가장 노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입버릇처럼 강조되는 ‘사기(士氣)’도 정동의 다른 말이다. 군인들의 ‘신체’에서 증진되기도 하고 저하되기도 ‘사기’는 궁극적으로 전투능력의 관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 질 들뢰즈,「정동이란 무엇인가?」,『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고.
xii) <매연·소음 단속>,《경향신문》3면, 1964.7.17.
xiii) <앵무새>는 방송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5분길이의 방송 시사칼럼이었다. 일상적이고 직설적인 표현과 암시적 야유, 반어적 기법의 어투에 날카로운 여자 성우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강렬한 사회비판의 효과를 만들었다. 일반의 청취율뿐 아니라 동아방송 사내의 청취율 또한 압도적으로 높았던 프로그램이었다. -백미숙,「라디오의 사회문화사」,『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한국언론재단, 2007,p.360 참고.
xiv) <도둑 쫓던 시민도 “통금위반이다”… 이 통에 놓쳐버려>,《조선일보》3면, 1968.3.6.
xv) <야경원에 집단폭행, 통금 지난 서울 밤은 공포지대>,《조선일보》3면, 1960.9.7 ; <통금위반으로 연행됐다 형사에 매 맞고 중태〉,《조선일보》7면, 1969.8.9.
xvi) <10년 방치된 밤의 교통지옥, 통금러시>,《조선일보》7면, 1969.3.27.
xvii) <통금 10분전 폭주택시 충돌>,《조선일보》3면, 1968.10.4 ; <세 곳서 행인치고 도주, 통금 전 과속차량>,《조선일보》3면, 1968.12.27 ; <통금에 쫓기던 자매 치여 중상>,《조선일보》, 1964.12.23.
xviii) <한국 뒤덮은 불청객전파>,《경향신문》5면, 1964.11.4. ‘붉은 소음’이란 표현도 이 기사에서 인용했다.
xix) <앰프 건드려 북괴방송 3분간>,《경향신문》3면, 19631.10.
xx) <현실(10) 보고가는 마을>,《동아일보》1면, 1963.8.27.
xxi) <앰프촌에 경찰간섭>,《동아일보》7면, 1963.11.21.
xxii) Steve goodman,「음향전(sonic warfare)란 무엇인가」, 윤원화 역 (원전:『Sonic Warfare: sound, affect & the ecology of fear』(MIT Press, 2009))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밝혀둔다.

3. 앰프村의 음향공동체

앰프村 하나를 구성하기 위해선 그다지 복잡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쓰는 라디오에 스피커를 여러 개 다는 것만으로도 앰프村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시스템에서는 각자 듣고 싶은 방송 주파수를 선택할 순 없지만 스피커의 볼륨을 조절해 소리의 크고 작음을 조절할 수는 있었다.
1957년부터 정부주도로 앰프村 사업이 시작된 이래로 1962년에는 앰프촌의 숫자가 1611개(정부 736/ 민간 875)로 늘어났고 32만 가구, 약 2백여만 명이 방송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xxiii) 1962년은 농어촌에 라디오 앰프 보내기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해이기도 했다. 앰프촌의 숫자는 1967년까지 3728개로 늘어나게 된다.
1963년에는 실종 어린이 ‘두형 군 찾기’가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됐는데, 라디오와 앰프의 네트워크도 이 일에 활용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아시아 레코드 사장 최지수가 냈다. 시골에는 유성기 있는 집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몇 년 사이에 앰프 시설이 광범위해진 데다가 레코드의 지방보급이 빠르게 이뤄지기 때문에, 두형 군을 찾는 노래를 인기가수가 불러 음반을 배포하면 실종 어린이를 찾는데 큰 효과가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이미자, 두형이를 돌려줘요, 아시아 레코드, 1963

그리하여 반야월 작사 나음파 작곡 이미자 노래의 <두형이를 돌려줘요>라는 레코드가 제작됐다.xxiv) 이 노래는 일절이 끝난 뒤에, 이미자의 애절한 내레이션이 흐른다.

“여보세요. 제발 애원이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천진한 어린 것을 제품에 꼭 돌려보내 주셔요. 네, 세상에 부모마음은 모두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네? 정말 애원이어요.”

같은 레코드에 수록된 동요조의 또 다른 곡 <두형아!>에서는 두형 군 어머니의 실제 육성이 흐른다.

“두형아! 울지 마라. 응? 착한아기지? 울면 바보야…… 아저씨 아줌마 말 잘 듣고 엄마아빠 보고 싶거든 네가 잘 부르는 노래 있잖아? 응「기타부기」말이야”

이 노래는 전국 곳곳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고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레코드와 라디오, 앰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입소문이 합해져 가히 ‘두형이 찾기 신드롬’이라 할 만한 현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형이를 보았다는 제보가 도처에서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헛소문이거나 악의적인 협박에 불과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두형 군은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이후 ‘두형이 찾기 신드롬’은 ‘어린이유괴 공포증’으로 뒤바꿔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병처럼 번져나가 또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xxv)
그렇게 흔한 사례는 아니지만 앰프를 범죄자 수배에 이용해 검거에 성공한 일도 있었다. 1962년 8월 2일, 청천 중학교에 다녔던 1학년생 이현우 군은 청천리 생고개에서 불량배 네 명에게 현금 86원을 강탈당했다. 사건 직후 이현우 군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앰프를 통해 각 부락에 수배를 해서 후평리 부락청년들의 도움으로 범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었다.xxvi) ‘앰프’가 부락과 부락간의 음향 공동체를 잇는 매개이자 메신저 역할로 생활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산간벽지에까지 앰프가 설치되고 대중가요를 즐겨 들을 수 있게 되자, 지방 고유의 민요는 60대 이상의 노인층만 희미하게 기억하게 됐을 만큼xxvii) 시골 풍속도 빠르게 변화했다.
1967년 3월 22일자《경향신문》에 실린 「대중大衆 속의 연운演芸」이라는 기사에는 통일호 3등 객차에서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젊은이의 대화가 스케치되어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지난번 시골에 가보니 모르는 노래가 없더군요. 밭갈이하는 농부가 동백 아가씨를 부르면서 일할 정도니까. 앰프와 라디오 덕택이죠.”
“원래 농촌의 유행가는 애조의 것이 많지 않아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두운 것보다는 밝은 노래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앰프와 함께 등장한 농촌의 새로운 풍속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다음은 《동아일보》1962년 2월 3일에 보도된 기사다. 마을사람들이 앰프 시설을 세무서의 밀주단속을 피하는 데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서광주 세무서에서는 지난 12월 중순과 1월 초순에 두 차례나 관내 본촌(本村)등 모부락에 밀주단속을 나갔으나 번번이 실패.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부락은 「앰프」촌으로 거의 집마다 유선방송시설이 돼있어. 이들 밀주 단속반이 부락어귀에 들어서기만 하면 곧 「마이크」를 통하여 “각 가정에 알려드립니다. 지금 세무서에서 밀주 단속을 나왔으니 빨리 감추십시요”라고 방송을 해왔다는 것. 인보상조(隣保相助)의 정신은 이해가 가지만 이렇게 위정당국을 골탕 먹인대서야 「앰프」촌 설치의 근본취지와는 어긋나지 않을까?

이 기사는 국가기구에 접속된 ‘앰프’村의 음향 장비가 일방적으로 국가의 음향공동체와 사운드스케이프를 증식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 지역의 음향공동체의 어떤 특이성에 앰프가 전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어떤 권력이나 기계 시스템에 의해 완벽히 장악되고 통제·구성될 수 있는 청각계(audiosphere)가 있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편집증적 망상이다. 그러나 박 정권은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고 검열과 단속의 수위를 점점 더 높여 갔다. 그것은 ‘장소’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에 의해 ‘소리’의 세계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대기가 고정되어 있을 수 없듯 소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음향공동체 그리고 사운드스케이프는 본질적으로 ‘소음’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어떤 종류의 ‘소리’ 혹은 ‘듣기’를 이루는 성분 가운데 이질적이거나 반동적인 게 섞여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면, 그건 ‘소리’ 그 자체의 성질과는 무관한 이념적인 판단의 소산이거나 그때의 음향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과의 관계의 속성에 근거한 문제다. 따라서 또 다른 이념과 사회관계 속에서 ‘소음’은 손바닥 뒤집듯 ‘소음’이 아닌 게 될 수 있다. 앰프와 라디오도 그 자리 그대로에서 완전히 다른 사회적 배치 속에 놓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는 그러한 변화가 더디고 요원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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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iii) <퍼져갈 앰프촌>,《동아일보》4면, 1962.7.19.
xxiv) <노래로 번지는 두형이 찾기>,《경향신문》7면, 1963.6.21.
xxv) <혹시 우리집 애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동아일보》3면, 1963.4.15.
xxvi) <4인조강도 앰프를 통해 수배>,《경향신문》3면, 1962.8.5.
xxvii) <사라져가는 민요수집>,《경향신문》5면, 1968.5.18.

4. 시인의 음향전(sonic warfare)

1969년이 되면 라디오가 202만 4천대, 스피커 130만 7천대, 텔레비전 21만대, 앰프는 7,466대로 524만 6천여 가구에 방송 수신기가 보급되게 된다. 이 때문에 “거리에도 집에도 음악이 쏟아져 나온다. 콩나물시루 같이 승객을 빽빽이 태우고 소음의 거리를 달리는 버스가 스피커로 방송음악을 뿌린다”xxviii)며 지긋지긋해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신동엽 시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는「시끄러움 노이로제」(1968)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도시 환경이 자신의 신체에 가하는 정동의 악영향을 막기 위해 보호 장비를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고 말한다. 귀를 막는 솜과 색안경이 그의 보호구였다.

요새 나는 흔히 두 귀를 솜으로 막고 다니기가 일쑤고 색안경은 거의 날마다 쓰고 다니게 됐다. 빛깔이 있는 안경을 쓰면 시끄러운 원색 양철조각들이 조금은 부드럽게 보이기도 하거니와, 정 보기 싫은 것이 있다면 눈을 슬그머니 감고 있어도 아무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니까 이상히 생각할 사람이 없어서 좋다. 그런데 두 귀를 솜으로 막고 다니는 문제만은 다시 생각해 봐야 될 일이다. 얼마 전 골목길을 걷다가 자동차한테 봉변을 당했다. 최신형 자가용 하나가 내 오금 뒤에서 급정거를 했다. 클락숀 소리를 못 들었냐는 것이다. 그 길이 내가 알기로 분명히 <제차 통행금지> 구역이었지만, 따지다 보면 귀 속의 솜도 뽑아내야 되겠고, 그러다 보면 시끄러움은 더욱 큰 시끄러움의 시련을 겪어야 할 것 같기에 아무 소리 없이 피식 웃어주고 내 발길을 재촉했다. (「시끄러움 노이로제」,『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 2009, p.349. 이하 페이지만 표기)

신동엽은 자신이 ‘시끄러움 노이로제’에 걸린 것 같다고 진단하면서, 자신보다 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온갖 소음으로 소용돌이치는 도시라고 비판한다. 그를 유독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생활의 소음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이 박정희 식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근대화 산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에 맞서는 그의 예술적 전략은 ‘음향전(音響戰)’이었다. 이것은 ‘소리’ 대 ‘소리’의 싸움이다. 그는 박정희와는 다른 의미에서 ‘앰프’이고자 했다.
1959년「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며 등단한 이후 간암으로 별세하는 1969년까지가 신동엽이 시인으로 활동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기 미디어가 빠르게 대중화하고 앰프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던 과정과 맞물려 있다. 신동엽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을 배격하기 보다는 직접 그 안에서 활동하길 마다하지 않는 시인이었다.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그는 한 라디오 방송에서 <내 마음 끝까지>라는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아직 안 주무시고 이 시간을 기다려 주셔서 고마워요.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군요. 좀 더 가까이. 좀 더 다가오셔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세요.”라는 오프닝 멘트와 함께 그는 전파와 라디오 수신기를 매개로 청취자들과 음향공동체를 이뤘다. 이 시기에 그는 원고지 350페이지 분량의 라디오 극본 「불쌍한 납덩어리」를 쓰기도 했다.xxix)
그는 1966년에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국립극장에 올리고, 1968년에는 오페레타 「석가탑」을 쓰고 제작했다.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동엽은 자신의 음향전을 관객들에게 직접 들려주고 싶어 했다.

(남, 여, 서로 팔을 뻗는다. 마주 잡으려고)
(귀를 째는 제트기 폭음 머리를 스쳐 하나가 지나간다. 이어 또 하나의 제트기 폭음, 가까이 내려오면서, 따, 따, 따, 따, 따, 따하는 기관포 사격소리. 무대는 온통 불꽃 바다가 되면서 오색조명 회전한다. 소리 멎고 무대 점점 안정되며 밝아지면서 남, 녀의 늘어진 시체 어슴푸레 나타난다. 늘어진 두 시체, 서로 한쪽 팔을 길게 뻗어 맞잡으려고 했으나, 겨우 두 손가락이 닿을 듯 접근해 있을 뿐이다)
(하늘 높은 솔바람 소리. 그리고 평화스런 산새들의 노랫소리. 밝고, 가벼운 음악, 상승되면서) (340p)

하지만 그의 음향전을 제압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암세포였다. 1969년 그가 별세한 후, 박정희의 시간은 1960년대를 넘어 70년대 내내 연장됐다.
오늘날 박정희 정권은 끝난 지 오래지만 과연 우리는 최악을 지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음향전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신동엽 사후 첫 번째 기일에 맞춰 『사상계』 1970년 4월호에 유고시 「좋은 언어」가 발표됐다. 이 시는 다가올 세대를 위한 음향전의 지침으로 읽어 마땅하다.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우자. 소박하지만 진실 된 이 한마디를 실천할 수 있다면, 권력의 부정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새로운 소리들로 바꾸고 억압된 정동을 회복할 수 있는 거점을 우리의 신체에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언어」을 다시 읽어본다.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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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viii) <음악의 남용>,《경향신문》5면, 1969.12.13.
xxix) 불행히도 이 작품은 방송되지 못한 미발표작으로 창작과비평 판 신동엽 전집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Author
junorex 임태훈

제도의 경계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적인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성균관대 국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광운대학교 교양학부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2011년 창간을 목표로 [네오픽션]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99년 삼성문학상 희곡부문에 [애벌레]가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에 당선된 후 『창작과 비평』, 『실천문학』, 『작가세계』 등에 평론을 발표했다. 대표글로는 [게릴라의 글쓰기], [미적지근한 시민들의 촛불을 위하여], [소리의 모더니티와 ‘音景'의 발견] 등이 있다. 2008년 2월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을 통해 SF호러 [팽형자]를 발표하며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09년 12월에 [101]로 한국추리소설작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박사논문으로 사운드스케이프 분석과 음향공동체에 관한 연구를 준비 중이다. http://blog.naver.com/junorex

3 Responses
  1. 황재웅 황재웅 says:

    좋은 글 정말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문외한으로서 “소리”에 대해 저도 모르게 가졌던 틀이 얼마나 편협했던 것이었는지 충격적으로 깨달아,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까지 하네요.

  2. Sound@Media Sound@Media says:

    말씀 감사합니다. 본 글을 흥미롭게 읽으셨다면 필자의 다른 글들도 필독해보시길 권합니다. ‘”소리”의 모더니티와 “음경(音景)”의 발견: http://bit.ly/cjGt9Z, “음경(音景)”의 발견과 “소설적 대응” – 이효석과 박태원을 중심으로: http://bit.ly/dz5c0D

  3. buy csgo buy csgo says:

    Great looking web site. Assume you did a bunch of your ownyour very own html co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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