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술 제도와 소리의 예술은 지금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이 글은 원래 영국의 엑시스(Axis)에서 발행하는 온라인 저널 <다이얼로그(Dialogue)>의 청탁으로 2007년 발표했던 것이다. 여기 게재되는 버전은 지난 3년 간의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사항을 추가하고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 리나 주베로빅(Lina Dzuverovic), 2010년 8월

사실 ‘사운드 아트’라는 하나의 장르로 재단할 수 없는 ‘소리의 예술(arts of sound)’이 미술 제도와 조우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음악과 라이브 아트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시각 예술과 꾸준히 상호 교류하며 혼성되어 왔다. 일찍이 이탈리아 미래파가 20세기의 처음 10년 동안 사운드 기반 작업의 토대를 닦았고, 1960년대부터 작가들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소리를 다양하게 ‘변장’시켜 미술 제도로 끌어들이는 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소리는 라이브 아트를 구성하는 ‘노이즈’ 또는 사운드트랙의 형태로 위장하고 미술가와 음악가의 협업을 통해 미술관과 갤러리로 스며들었다. 워홀의 팩토리, 비디오 아트, 아트 밴드, 플럭서스, 퍼포먼스 아트 등에 편승하기도 하고, 미술관 부설 서점에서 상품 형태(CD, LP, 테이프)로 구입할 수 있는 예술가의 한시적 흔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면서, 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술 제도와 미술관에 출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 그 자체가 전시의 초점으로 떠오른 적은 별로 없었다. 소리를 매체로 활용하는 다양한 작업들을 집중 소개하는 전시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껏해야 20여년 전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 제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리를 시각 예술이나 동영상의 부차적 요소나 ‘배경음’으로 치부하는 대신 ‘예술적 매체로서의 소리’에 관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사운드 문화

크리스토프 콕스(Christoph Cox)는 <오디오 문화: 현대 음악 선집(Audio Culture: Reading In Modern Music)>(2004)에서 ‘음향적 실체, 청취라는 행위, 녹음·재생·전송의 창조적 가능성에 주목하는 음악가, 작곡가, 사운드 아티스트, 학자, 음향적 측면에 주목하는 적극적 청취자들’이 주축이 되어 오디오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진단한다. 이처럼 사운드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는 데에는 지적인 노력도 한몫 했다. 20세기 미술에서 소리가 개입했던 핵심적 국면을 본래의 역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하는 더글러스 칸(Douglas Kahn)의 <잡음, 물, 고기: 미술 속의 소리의 역사(Noise, Water, Meat: A History of Sound in the Arts)>, 그리고 더글라스 칸과 그레고리 화이트헤드(Gregory Whitehead)가 20세기 라디오와 소리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문헌들을 취합, 편집한 <무선 상상(Wireless Imagination)>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온라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사운드 문화에 관한 더욱 다양한 독립적 기획이 쏟아지고 있는데, 특히 시인이자 작가인 케네스 골드스미스(Kenneth Goldsmith)가 운영하는 우부웹(UbuWeb),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웹사이트 WPS1, 뉴욕시 독립 라디오 방송국 WFMU, 런던 음악가 연합의 레조넌스 FM 방송국(Resonance FM) 등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운드 기반의 다양한 예술적 생산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훌륭한 채널이다. 또한 사운드 문화에 초점을 맞추는 독립 프로젝트와 풀뿌리형 기획도 지난 몇 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2010년 7월 18일에는 “우리 주변의 세계 전역과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청취라는 실행을 기념”한다는 취지 하에 세계 청취의 날(World Listenining Day)이 처음 선포되었다. 또한 런던의 사운드 피요르드 갤러리(Sound Fjord Gallery), 독립 전시 기획 집단 사운드 쓰레숄드(Sound Threshold)라디오 갤러리 프로젝트(Radio Gallery)등도 현재 급격한 변이를 겪으며 모멘텀을 획득하고 있는 역동적인 현장의 좋은 사례이다.

사운드 문화 관련 선집 출간도 활발하다. 앨런 릭트(Alan Licht)의 <사운드 아트: 범주들 간에, 음악을 넘어서(Sound Art: Beyond Music, Between Categories)>, 살로메 뵈겔린(Salome Voegelin)의 <잡음과 침묵에 귀기울이기: 사운드 아트의 철학을 향하여(Listening to Noise and Silence: Toward a Philosophy of Sound Art)>, 마이클 불(Michael Bull)과 레스 백(Les Back)이 편집한 <청각 문화 선집(Auditory Culture Reader)>, 롭 영(Rob Young)이 편집한 <언더커런츠: 현대 음악의 숨겨진 배선(Undercurrents: The Hidden Wiring Of Modern Music)>, 크리스토프 콕스와 대니얼 워너(Daniel Warner)가 편집한 <오디오 문화: 현대 음악 선집> 등은 모두 20세기 역사에서 소리의 위치를 재맥락화하려는 시도이다. 기존의 시각적인 것이나 음악적인 것과도 구별되는 ‘음향적(sonic)’ 생산이라는 관념은 심지어 광고 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무언가 음향적인 것을 시작하세요(Start Something Sonic)”라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XP 캠페인 슬로건을 떠올려 보라. 저렴하고 간편한 기술적 도구로 소리를 만들고 녹음해서 P2P 사이트로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사운드 기반의 생산과 유통이 친숙하고 일상적인 행위로 변모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사운드 기반 작업이 전과 다른 궤적을 따라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미술관의 사운드 문화

이처럼 ‘오디오 문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점차 미술관, 갤러리, 쿤스트할레—역사적으로 시각 문화에 의해 지배되었고 애초에 전통적인 미술적 생산(주로 회화와 조각)을 보존하기 위해 수립된 제도적 장치들—로도 침투하고 있다. 이 글은 시각 미술의 제도와 ‘오디오 문화’의 접점들을 살펴보면서, 미술 제도의 맥락에서 어떤 ‘음향적 실체’가 중요하게 취급되는지, 두 분야가 어떻게 동화하고 그 과정에서 또 어떤 분열이 나타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지난 10년 동안, 소리 그 자체에 주목하는 전시는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 2000년에 영국, 일본, 미국의 주요 미술 기관들은 일제히 대규모 사운드 관련 전시를 선보였다. 먼저 영국에서는 모던 아트 옥스포드(Modern Art Oxford)가 <청각적 빛(Audible Light)>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가 <소닉 붐(Sonic Boom)>을 들고 나왔다. 또한 일본에서는 도쿄 NTT ICC가 <사운드 아트: 미디어로서의 소리(Sound Art: Sound As Media)>를, 미국에서는 뉴욕 PS1이 <소리의 침대(Bed of Sound)>을 내놓았다. 이러한 선례를 따라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소리를 주제로 하는 전시가 쏟아져 나왔는데, 대개 외부 큐레이터를 영입해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의 대형 기획 순회 전시 <음향적 과정; 소리의 새로운 지리학(Sonic Process; A New Geography Of Sound)>(2002), 브리스톨의 아놀피니 갤러리(Arnolfini Gallery)가 큐레이터, 음악가 겸 작가인 데이빗 툽(David Toop)을 영입해서 만든 <존 케이지와 놀기(Playing John Cage)>(2005)가 대표적인 예다. 또한 이 무렵 런던에서는 일렉트라(Electra, 주-필자가 공동설립하고 디렉터를 맡고 있는 런던 기반의 현대예술 에이전시)의 전시 <그녀의 잡음(Her Noise)>이 사우스 런던 갤러리(Sound London Gallery)를 중심으로 테이트 모던(Tate Modern)과 괴테 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e) 등 다양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전시는 미술 제도가 이 분야의 예술적 생산에 예전보다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각종 퍼포먼스, 콘서트 등도 마찬가지 징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사운드 아티스트에 대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제도적 지원(작품 제작, 위탁, 구입 등으로 가시화되는 구체적인 지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미술 제도가 음향적 작업을 받아들이고 그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소리에 대한 제도적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며 게다가 아직은 초기 발전 단계에 불과하다.

음향적 작업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정초하려는 시도는 계속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WPS1 라디오 방송국과 가변적 미디어 네트워크(Variable Media Network)이다. 뉴욕 PS1이 블룸버그(Bloomberg)의 후원 하에 2003년 발족한 WPS1 라디오 방송국은 “세계 최초의 예술 전문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이자 “사이버스페이스의 라이브 오디오 미술관”을 지향한다. 또한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프랭클린 퍼니스(Franklin Furnace), 리좀(Rhizome) 등이 주축이 된 가변적 미디어 네트워크는 한시적 포맷으로 제작된 예술작품의 보존 방법을 연구한다. 하지만 늘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테이트 컬렉션(Tate Collection) 데이터베이스를 조사해 보면, 현재 6만5천 여점에 이르는 전체 컬렉션 중에서 사운드 기반 작업은 쟈닛 카디프(Janet Cardiff)의 <40파트의 모테토(Forty Part Motet)>(2001), 앵거스 페어허스트(Angus Fairhurst)의 <갤러리 커넥션(Gallery Connections)>(1991-96), 트리샤 도넬리(Trisha Donnelly)의 <무제(Untitled)>(2003) 등 고작 대여섯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충격적인 통계치는 미술관이 소리라는 특별히 일시적인 매체에 대해 장기적이고 깊이 있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테이트 컬렉션은 “1500년 이후 영국 미술과 1900년 이후 국제 현대/컨템포러리 미술을 수집하는 국립 컬렉션”으로서 “회화, 조각, 드로잉, 판화, 사진, 영화,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등 모든 매체를 망라한다”고 자처한다. 여기서 사운드 기반 작업은 설치 또는 퍼포먼스로 분류된다. 그것이 테이트가 구입한 극소수의 사운드 기반 작업이 처한 상황이다.

소리의 예술이 미술 제도로 진입하는 방식: 몇 가지 모델들

그럼 이제 미술 제도가 소리의 예술에 관여하는 방식을 몇 가지 모델로 분류해 보면서, 오늘날 사운드 기반 작업과 제도적 프레임 간의 긴장 관계를 살펴보자. 아래에 나열하는 모델들은 분명히 사운드 기반 작업의 가시성을 높이고 그런 작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데 기여한다. 하지만 자세히 분석해보면 대다수는 피상적인 관여의 플랫폼을 창출할 뿐 장기적으로 소리의 예술이 미술관에 통합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국 문제는 다음과 같다. 미술관에 진입한 사운드 기반 작업 중에 제도적 유산으로 통합되는 것은 어느 정도인가? 다시 말해서, 미술관이 영구 컬렉션을 구성하고 향후 학술적 연구에 쓰일 수 있도록 소장품 카탈로그를 만들 때 사운드 기반 작업이 얼마나 많이 포함되고 있는가?

1. 오브젝트 기반 작업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음악가/사운드 아티스트가 전시 오프닝, 파티, 특별 행사에 초청되어 여흥을 돋우는 경우

소리로 작업하는 작가나 음악가가 어느 정도 유명해지고 나면, 전시 오프닝에서 음악을 틀거나 파티 또는 비공개 관람 행사에 ‘사운드스케이프’를 제공하는 용도로 자주 초청된다. 하지만 정 반대의 상황을 상상해 보라. 어떤 음악가가 공연을 하는데 화가를 불러서 벽에 예쁘게 그림 좀 그려달라고 하면 어처구니 없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은 와인 잔을 든 관객들이 미술관을 거닐며 전시와 음악을 감상하는 ‘음악의 밤’ 행사를 미술관이 소리에 관여하는 일반적 방식으로 여기는 전통적 모델의 연장선 상에 있다. 이런 행사는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기도 하고 비공개로 소수의 ‘친구’나 기부자만 초대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주인공은 전시된 작품들이고 음악은 그저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용도일 뿐이다. 이 모델의 좀더 최신 버전은 주요 비엔날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프닝에 음악가와 사운드 아티스트를 초빙해서 여흥을 돋우고 매력을 더하는 것이다. 최근의 예로, 테이트에서 UBS의 후원으로 컬렉션 전시 배치를 새로 고친 후에 그 결과를 처음 선보이는 비공개 파티가 있었다. 테이트는 이 파티를 위해 스테판 비티엘로(Stephen Vitiello)를 초빙하여 사운드 기반의 환경 작업을 청탁했고, 그 결과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Turbine Hall)에 멋진 설치 작업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을 볼 수 있었던 건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들뿐이었고, 테이트는 이 작업을 대중에 공개하거나 홍보하지 않았다.

2. 전시에서 음악가와 작가가 협업하는 경우

이 모델은 미술관이 사운드 아트에 좀더 깊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대개는 제도 측에서 사운드 기반 작업을 들여오는 데 미진한 태도를 보이는 데서 그친다. 크리스티네 반 아스셰(Christine Van Assche)가 기획한 <음향적 과정; 소리의 새로운 지평>(퐁피두 센터, 2000)은 음악가와 사운드 아티스트가 시각적인 작업을 하는 다른 작가들과 짝을 지어 다양한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이를테면 마이크 켈리(Mike Kelly)와 스캐너(Scanner)가 협업하고, 리차드 돌프마이스터(Richard Dorfmeister)와 루페르트 후버(Rupert Huber)가 가브리엘 오로츠코(Gabriel Orozco)와 함께 작업하는 식이었다. 이 전시는 작가들에게 신작을 청탁했지만, 전략적으로 동영상이 들어간 ‘미술관 친화적인’ 하이브리드 작업을 선호했다. 이는 전시의 초점이 관객의 취향을 너무 벗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종의 안전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전시는 전자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탐험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사운드 아트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뭇거린 탓에 평범한 비디오 설치 전시로 끝나고 말았다.

3. 퍼포먼스 또는 교육 담당 부서에서 사운드 기반 작업을 들여오는 경우: ‘새로운 관객에 손을 뻗치는’ 수단으로서의 음악

비교적 지명도가 낮은 분야가 미술관에 진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교육 담당 부서나 퍼포먼스/라이브 아트 기획을 통하는 것이다. 이들은 제도적 위계 하에서 ‘서열이 낮기’ 때문에 제도적 현안이나 예산의 압박에서 다소 자유로운 편이고, 그래서 오히려 자유롭게 운영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미술관에서 6-8주 짜리 설치 작업을 청탁받는 것보다는 한 번 하고 끝나는 이벤트를 따내기가 훨씬 쉽다. 이를테면 서펀틴 갤러리(Serpentine Gallery)의 최근 사운드 이벤트, 테이트 브리튼의 ‘레이트 앳 테이트(Late at Tate),’ 화이트채플(Whitechapel)의 ‘음악 속으로의 모험(Adventures in Music)’가 이런 부류에 속하는데, 일렉트라를 통해 다양한 제도권과 협업을 해본 내 경험으로는 미술관과 갤러리에 사운드 기반 작업을 들여오는 데 가장 협력적인 파트너는 역시 퍼포먼스나 교육 담당 큐레이터들이다. 최근 일렉트라가 테이트 모던에서 크리스티안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크리스마스의 소리(Sounds Of Christmas)>(2004), 머리너 로젠펠드(Marina Rosenfeld)의 <감정적 오케스트라(Emotional Orchestra)>(2005)와 <얇은 서리 오케스트라(Sheer Frost Orchestra)>(2006) 등을 진행한 것은 모두 이런 채널을 통한 결과다.

4. 록 음악과 미술의 만남: ‘아트 밴드’ 전시회

지난 10년 간 음악과 미술의 상호 침투를 탐구하는 전시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런 전시는 종종 록 음악의 유품이나 기타를 진열하거나 음악가들의 ‘쿨한’ 부분을 끌고 들어온다.) 대표적인 예로 뉴욕현대미술관 PS1의 최근 전시 <음악은 더 나은 소음이다(Music Is A Better Noise)>(2006)와 시카고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Chicago)>에서 도미닉 몰론(Dominic Molon)이 기획 중인 <악마에 대한 공감: 1967년 이후의 미술과 록큰롤(Sympathy for the Devil: Art and Rock and Roll Since 1967)>이 있다.

5. 작가가 겸 음악가가 자신의 미술관 전시에 음악이나 소리를 집어넣는 경우

소리의 예술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또 다른 방식은 아주 유명한 작가가 요행히 음악가이거나 사운드 작업에 발을 깊이 담그고 있는데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는 경우다. 소리 관련 작업이 회고전이나 개인전에 포함되어 작가의 다른 작업과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사운드 아트가 미술관 공간에 들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로드니 그래엄(Rodney Graham), 마틴 크리드(Martin Creed), 크리스티안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 쟈닛 카디프(Janet Cardiff) 등이 대표적인 예다.

6. 사운드 아트 전시

지난 10년 간 사운드 기반 작업을 대중에 소개했던 가장 두드러진 전시들은 소리의 예술 자체를 하나의 장르로 접근한 경우였다. 이런 전시는 ‘사운드 아트(Sound Art)’라는 비교적 협소한 정의 내에 전시작들을 자리매김하는데, 대개는 소리, 공간, 건축, 빛의 속성과 상호 관계에 관심을 두는 형식주의적인 작업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유형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으로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Schirn Kunsthalle)에서 열린 <진동수[헤르츠](Frequencies[Hz])>(2002)를 들 수 있다. 이런 전시는 음향적 작업을 보여주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지원이 비교적 후하다는—다시 말해서 작품 제작 및 설치에 상당한 기술적, 경제적 지원이 뒤따른다는—장점이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장르 간의 협소한 틈새에 자리매김하는 ‘사운드 아트’라는 꼬리표가 자칫 작업을 주변화할 위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사운드 아트’라는 장르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전시를 보러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일렉트라 관련 일로 제도권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은데, 그 사람들은 종종 ‘사운드 아트 전시라면 몇 년 전에 벌써 했는걸요.’라는 식으로 반응한다. 이는 제도권이 이런 분야를 한번쯤은 건드려줘야 하는 여러 ‘다양성’ 중 하나로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7. 소리와 시각: 공감각에 관한 전시

최근 몇 년간 소리라는 ‘재료’를 탐구하는 많은 전시에서 ‘공감각(synaesthesia, 두 가지 이상의 신체적 감각이 서로 연관되는 신경적 조건)’을 키워드로 내세웠다. 이런 전시는 대개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2009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이 소리를 보라(See This Sound)>, 뉴욕의 독립큐레이터 인터내셔널(iCI)에서 조직한 순회 전시 <색채는 어떤 소리를 만드는가(What Sound Does A Colour Make)>,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허쉬혼 미술관(Hirshhorn Museum)과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이 공동 기획한 <시각적 음악(Visual Music)>,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2004-5년에 열린 <빛과 소리(Son Et Lumieres)>가 있다.

8. 신작 청탁과 신흥 갤러리

지금도 미술관에서 사운드 기반의 작업을 청탁하거나 수집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러한 ‘장애물’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여러 가지다. 작업 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기존 공간에 전시하기 어렵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미술관이 관객 수를 늘이고 쉬운 작업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경우 사운드 기반 작업은 대개 ‘어렵다’고 일축된다), 장비에 돈을 써야 한다, 방음이 곤란하다 등이 거절의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일부 의욕적인 사례도 있다. 일례로, 2008년 베를린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Hamburger Bahnhof)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건축가 겸 작가 베른하르트 라이트너의 초기작(보도 자료에 따르면 “시각 예술의 역사상 최초의 소리-공간-조각”)전시, 2004-5년 테이트 모던 터빈 홀에 설치된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의 <원재료(Raw Materials)>와 2006년 플랫폼 포 아트(Platform For Art)의 협력으로 테이트에 들어온 빌 폰타나(Bill Fontana)의 <하모닉 브릿지(Harmonic Bridge)> 설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나우만과 폰타나의 작업은 테이트 컬렉션에 속하지 않으며, 이는 미술관이 이런 작업들을 충분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미술관이 좀더 충실하고 깊이 있게 관여한 사례로, 노스애덤스에 있는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MASS MoCA)은 상당 수의 소리 관련 작업을 청탁하고 영구 소장했다. 그리하여 브루스 오들랜드(Bruce Odeland)와 샘 오인저(Sam Auinger)의 <하모닉 브릿지(Harmonic Bridge)>, 발터 팬드리히(Walter Fändrich)의 <채석장을 위한 음악(Music for a Quarry)>, 크리스티나 쿠비쉬(Christina Kubisch)의 <시계탑 프로젝트(Clocktower Project)> 등의 소리 관련 작업들이 미술관 웹사이트의 ‘현재 전시’ 섹션에 소개되고 미술관 프로그램에 영구 귀속되었다. 마찬가지로 코네티컷 주 릿지필드의 앨드리히 현대미술관(Aldrich Contemporary Art Museum)은 2004년 개관한 신관에 사운드 갤러리를 별도로 마련하고 장기적으로 소리 관련 작업을 전시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위스콘신 주 밀워키 미술관(Milwakee Art Museum)은 2006년 12월 컨템포러리 섹션을 재설치하면서 지난 30년 간 모은 다양한 소리 관련 작업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3년이 지난 2010년 현재 미술관 웹사이트에는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이 없는 상태다.)

9. 사운드가 그냥 메시지 전달용으로 쓰이는 경우

시각 예술의 문화와 소리의 가장 성공적인 접점들 중에 어떤 것들은 거의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소리가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종의 배달부로서, 더 큰 임무의 일부로 통합되는 경우에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진다. 지난 2008년의 마니페스타 7(Manifesta 7, 유럽현대미술비엔날레)은 최근의 사운드 작업 중에서도 매우 복합적인 사운드 기반 설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업은 ‘사운드 아트’로 지칭되지 않는데, 기본 착상과 개념이 음향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통상적인 관심사나 감수성과 조금 다른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담 부닥(Adam Budak), 안젤름 프랑케와 힐다 펠렉(Anselm Franke/Hilda Peleg), 락스 미디어 컬렉티브(RAQS Media Collective)가 마니페스타 7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시나리오들(Scenarios)>은 전시 장소를 청취-관람자의 상상 속으로 전환시키는 ‘비물질적’ 전시이다. 전 세계의 문학가들이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글을 써서 보냈다. 포르테차/프란첸스페스테(Fortezza/Franzensfeste)라는 19세기 요새 여기저기에 설치된 이 작업은 최근 수 년간 주요 미술 제도권에서 착수한 음향적 구상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성과일 것이다. 음향 작업이 서로 다른 언어들로 바뀌어 가며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하는 이 프로젝트는 개념적 수준에서 ‘사운드 관련 장르’가 아니라 특정 장소와의 관계 속에서 상상적 시나리오들에 관여하는 독특한 실험으로서 의도되었다.

소리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수 세기 동안 우리와 함께 하면서 음악당, 오페라하우스, 거리 축제와 그 사이의 다양한 맥락에서 공연되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소음: 음악의 정치경제(Noise: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귀를 귀울이자’라는 넓은 맥락에서 음악과 음악가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아탈리는 음악 또는 “사회의 소음”이 그 사회의 거울이자 미래의 전언이라고 본다. 그는 우리가 사회의 소리—이를테면 예술이나 페스티벌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고 시사한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듣기 위한 것 …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소음을 구조화하는 음악적 프로세스가 공동체를 구조화하는 정치적 프로세스이기도 하다는 아탈리의 생각은 종종 지나친 단순화로 흐르기도 하지만, 그의 글은 사회와 소리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술관이 예전보다 좀더 적극적으로 사회의 잡음에 관여하려는 추세는 우리의 문화에 어떤 심층적 변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원래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적 오브제를 전시하고 보존하도록 고안된 공간에서 전에 없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면, 이런 사운드 작업을 포괄할 수 있도록 미술 제도의 역할, 경제적 모델, 전시와 보존의 전략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실제 소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 소리가 어디서 어떤 형태로 보존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어떤 기관이든 사운드 기반 작업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예술작품을 대하듯 사운드 작업에 대해서도 충분히 헌신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런 문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앞에 언급한 여러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사운드 작업에 진정으로 관여하려는 미술 제도는 사운드 작업의 청탁, 전시, 수집이 상당한 시간과 경제적, 물리적 헌신을 요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운드 작업을 미술관에 들이려면 기존 공간에 대한 건축적 재조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오디오 문화’의 개념이 등장하고 컨템포러리 아트의 맥락에서 그 개념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면서,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가 이 새로운 경향에 발맞추려 노력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술 제도가 사운드 작업에 충분히 깊이 있게 관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위에 언급한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처럼 사운드 기반의 작업을 청탁하고 그에 최적화된 공간을 마련하는 경우는 소리의 예술에 좀더 심도 있게 관여하는 모범적인 사례다.

관건은 어떤 실행의 노선이 미술 제도의 헌신과 투자를 받을만큼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소리의 예술이 미술관에 ‘속하는지’ 아니면 공공 장소, 공연장, 독립적 이니셔티브, DIY 갤러리 등으로 흩어지는 편이 더 나은지, 사운드 관련 실행이 수집, 연구, 전시돼야 하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일부로 미술관에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질문해야 한다.

여기서 ‘소리의 예술’이라고 묶이는 다양한 작업들을 하나로 정의할 규준이 없듯이, 그런 작업들과 미술관의 이상적인 관계 또한 하나로 귀결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결론은, 넓은 의미에서 오디오 문화에 대한 제도적 관여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제도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이 있어야 하며, 충분히 자원을 제공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적극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미술 제도의 여러 기관들과 다양한 사운드 기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프로젝트의 성공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어떤 작가나 작품에 대해 기관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술 제도에서 사운드 기반 프로젝트가 충분히 이목을 끌지 못하고 실패하는 까닭은 사운드 전시 자체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프로젝트 커미셔너나 해당 제도가 충분한 자원과 시간, 헌신을 보이지 않기 때문일 때도 많다. 제도적 관여의 수준은 결국 제도권에서 그 작업에 얼마나 가치를 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 작품의 가치 기준이 무엇인가, 시대별로 어떤 기준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정하는가 하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부터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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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Attali, Jacques, (1977), Noise: The Political Economy Of Music.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Bull, Michael & Back, Les, (2003), The Auditory Culture Reader. Berg, Oxford and New York.
Cage, John, (1973), Silence: Lectures And Writings. Marion Boyars, London.
Cox, Christoph (ed), (2004), Audio Culture: Readings In Modern Music. Continuum Books, London, New York.
Kahn, Douglas, (1999). Noise, Water, Meat: A History Of Sound In The Arts. MIT Press, Cambridge, Mass, London.
Kahn, Douglas, & Whitehead, Gregory (eds), (1994), Wireless Imagination: Sound, Radio & The Avant Garde. MIT Press, Cambridge, Mass, London.
Labelle, Brandon, (2004), Site Specific Sound. Errant Bodies/Selektion, California, Frankfurt.
Toop, David, (1995), Ocean Of Sound, Aether Talk, Ambient Sound and Imaginary Worlds. Serpents Tail, London.
Toop, David, (2004), Haunted Weather: Music, Silence And Memory. Serpents Tail, London.
Young, Rob (ed), (2002), Undercurrents: The Hidden Wiring Of Modern Music. Continuum Books, London, New York.

***번역자 소개: 윤원화
번역자. 필자. 주로 글을 만지는 일을 한다. 역서로 <디자인을 넘어선 디자인>(공역), <컨트롤 레벌루션>, <청취의 과거> 등이 있다.

Author
Lina Dzuverovic Lina Dzuverovic

런던에 기반을 둔 현대예술 에이전시 Electra의 공동 설립자이자 디렉터. 사운드, 영화, 퍼포먼스, 시각예술 등을 넘나드는 아티스트들과 탈경계적인 작업을 기획해왔다. 그녀가 기획한 대표적인 사운드 관련 전시로는 Sounds Of Christmas by Christian Marclay (Tate Modern, 2004), Her Noise (South London Gallery, 2005), 27 Senses (Kunstmuseet KUBE, Norway, 2009)등이 있다. 런던 ICA 미디어아트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The Wire, Mute 매거진 등에서 일한 적이 있다.